13월의 어느 한낮에 그림자없는 몽상가

'Across the Universe/Arachnoid'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1/19 about Pepper
  2. 2010/01/19 about Arachne
  3. 2010/01/19 # 0 # Arachne

내가 좋아하는 페퍼양에 대한, 좋아하는 묘사. 이런 후줄근한 인간이 좋다.

본래 검었을 망토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새뽀얗게 먼지가 앉아 조금만 들썩여도 먼지구름이 일곤 했다. 가죽으로 만들었을 신발은 날근날근하게 삭아서 물먹은 종잇장 같다. 왼발에 신겨진 신발에서는 엄지발가락 하나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망토로 가려져 있지만 그 헐거워진 천의 헤어진 올올 사이로 보이는 옷가지도 멀쩡한 모양은 아니었다. 누렇게 빛이 바랜 면직물이 후줄근하게 늘어져 바지를 덮고 있었는데, 이 바지란 것의 모양도 흘끗 보아도 겨우겨우 바지라고 해 줄 만한 것이었다. 저 끝에서 이런 구석까지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해 온 여행자의 옷차림이라고 해야 그냥저냥 그러려니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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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Pepper  (0) 2010/01/19
about Arachne  (0) 2010/01/19
# 0 # Arachne  (0) 201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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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내가 좋아할 듯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라크네양.
이런 건방지고 제멋대로에다가 남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 싫어함.
그리고 뻔뻔하게 그런 사람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지요.
어쩌면 부러워하는 걸지도.
내 스스로가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 그녀의 대사를 쓰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


그는 몇 번쯤 로브 너머로 그녀를 살폈다. 기묘한 처녀, 아니, 아직은 소녀라고 해야 맞겠다. 화려하게 흩어졌다 다시 모여드는 카드는 손을 슬쩍 뒤집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들이었다. 그 카드를 모으는 손은 농가의 아낙처럼 마디마디 매듭졌으나 귀부인의 그것처럼 하얗게 메말라있었다. 아니다, 그런 뽀얀 손가락은 아니었다. 그 생채기가 덕지덕지 앉은 손에는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작물의 창백함이 스며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카드를 배열하며 눈을 반짝였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속에서도 선연하게 빛났다. 몸서리치는 그를 보고 아라크네가 깔깔하는 웃음을 뱉었다.

“자, 당신의 운명을 들춰볼 준비가 되셨다면 저에게 손을.”

그런 거창한 소리를 주절이는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런 것으로 과연 나의 미래를...”

“알 수 없죠, 물론.”

그는 뒤통수라도 맞은 얼굴로 아라크네를 바라보았다. 아라크네가 다시 깔깔하고 웃었다.

“당신이니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의 점이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 뿐이에요. 내가 받는 돈은 싸구려 이야기꾼이라도 나무칼을 두들기며 한껏 추스르면 받을 만한 이야기 값이죠.”

선득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긴장했던 탓이다. 나름으로는 대단한 각오를 하고 나선 점집이다. 그런데 마을에서 가장 용하다는 점쟁이가 한다는 소리는 맥을 탁 빠지게 했다.

“자, 그렇다고 해도 제 점을 보시겠습니까? 저는 좋아할 만한 얘기라고 해도 틀린 소리는 하지 않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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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Pepper  (0) 2010/01/19
about Arachne  (0) 2010/01/19
# 0 # Arachne  (0) 201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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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시진님의 폐쇄자에서
거미줄들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다보니 거의 저 자신의 오리지널로 수렴하고 있습니다만.
미리 얘기는 해 두겠습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아주 어릴 때의 꿈을 꾼다.

먼지와 땟국으로 얼룩진 치맛자락도 석류와 같이 아롱지게 하던 그 화려한 모닥불이 있다. 태양 아래서의 고달픔이란 그저 꿈과 같다고 귓가에 속삭이던 그녀들이 있다. 벌겋게 물들어 바닥을 두들기는 탄력있는 발길질들이 있다. 때가 절어 번질번질한 북의 가죽들과 별처럼 반짝이던 탬버린의 쇳조각들. 왁자하게 솟구쳤다가 흩어지는 웃음소리들. 길게 꼬리를 끌며 올라가던 하얀 연기들.

그 속에서 나 또한 춤추고 때로는 흐느끼곤 했다. 그러면 그녀들은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며 까슬한 입술을 볼에 비벼대곤 했다. 울지마라, 아가. 우리가 있잖니. 무서운 꿈은 저어기로 갔다. 저기? 저어기. 나는 모르겠어. 무서워. 그럼 우리 아가를 위해 무서운 꿈을 멀리 쫓아버려야지. 그녀들이 웃으며 입가로 가져가는 손가락에는 무늬없는 반지들이 불빛에 달아오르곤 했다.

저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까르륵한 웃음을 숨넘어가게 웃어대면서 그녀들은 모닥불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았다. 어느 순간에 나는 그녀들의 손을 잡고 어느새 그 말을 주문처럼 읊어대는 것이다. 저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왁자한 웃음 속 어느결에는 귓가로 젖은 목소리가 스미기도 했다. 다 저리로 가라. 오지 말아라. 다시는 오지 말아라. 어서 저리로 가련!

그리고는 더욱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탬버린 소리, 북소리는 더욱 빨라지고 화려해지는 것이다. 눈물의 보상이기라도 한 듯, 요란스럽고 화려한 소리들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그녀들과 함께 춤을 추곤 했다. 땅을 딛고, 하늘을 차고, 땅을 딛고, 하늘을 차고. 춤이라고 해 봐야 그런 단순한 동작들뿐이었지만 항상 누구보다도 흥에 겨웠다. 힘에 겨워 제풀에 지쳐 주저앉으면 그녀들은 나를 모닥불 가에 앉혀두고 탬버린을 쳐 올렸다. 타캉타캉, 단순한 리듬이 어느 정도 이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빠르게 손이 움직였다.

치맛자락이 휙휙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치마 밑으로 갈색으로 그을린 다리들이 힘껏 땅을 박찼다. 치마는 하늘을 덮고 발은 땅을 두들긴다. 북소리는 심장이 뛰는 리듬을 빼앗는다. 땅을 박차고 튀어오르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북채였다. 그녀들이 대지를 두들기는 소리에 심장이 뛴다. 숨이 막힌다. 땀방울이 튀어 나에게 닿아오기도 했다.

아하야, 땅은 넓다. 내가 갈 곳 없으랴! 누군가의 높은 목소리가 하늘을 찢으면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받았다. 빵 한 조각에 물 한 모금이면 죽을 법이야 없지, 삶이란 즐거워라!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험한 인생이었다. 빵 한 조각에 물 한 모금도 얻기 힘든 날이 더 많았으니까.

유랑극단? 그래, 그런 부류의 집단이었다. 극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조잡한 조직이었지만. 그저 춤을 추고 노래를 해서 얻어들이는 동전 몇 닢으로 하루 먹을거리를 사들이곤 했다. 말했던 대로 빵 한 조각을 얻기 힘든 날이 있는가 하면 싸구려나마 포도주를 한 모금쯤 입술에 적셔보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보통은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돌멩이 세례를 받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자기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이니까. 지금처럼 그때도 그랬다. 도둑년 소리에 눈에 물기가 어려 바득바득 악을 쓴 적도 많았다. 길을 걷다가 흙바닥에 버려진 곰팡이 핀 빵 한 조각을 주워먹다가 밤새도록 열이 올라서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들은 나의 손을 잡아주며 단조로운 가락의 자장가를 나직하게 불러주다가 울어버리곤 했다.

광산촌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우리는 언제나 환영받았다.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달콤한 과자 한두개는 언제나 나에게 그곳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할머니, 다음에 언제 광산에 가? 요놈이, 알지도 못하고? 언제나 낡아빠진 옷자락을 머리위로 깊이 눌러쓴 나의 할머니는 쿨럭하는 기침소리와 함께 그렇게 대답했다. 애가 말하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마요. 우리는 괜찮으니까. 웃어가며 그런 말을 한 뒤에는 꼭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리는 아델라였다. 네가 착한 언니를 울렸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어서 와락 울어버리는 것이다.

광산촌에 가면 레뮤엘은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내 손을 말없이 꼭 쥐어주었다. 그럴 때 그는 아델라의 이름을 들먹이며 농을 거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얼굴을 붉혀가며 고개를 젓는 수줍은 청년같지 않았다. 있잖아, 나 지난번에 봤다? 대답은 늦었다. 뭘? 아델라랑 뽀뽀했었지? 나 봤다. 그때 그의 눈에서 떨어지던 굵은 눈물방울을 기억한다. 응... 와, 다 큰 어른이 운대요! 울지마, 응? 털이 부숭부숭한 거친 손에 어디론가 끌려가던 아델라의 넋 나간 듯한 표정도 기억한다. 무엇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이었다.

포도주가 아닌 독한 술을 처음 먹어본 것도 그곳이었던 것 같다. 나도 너 만한 딸이 있지. 벌써 코가 빨간 어떤 아저씨는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어린것이 안됐다. 그 아저씨가 탁자에 엎어지면서 신음처럼 웅얼댔던 말이었다. 아마도 탁자가 춤추다가 아저씨한테 부딪쳤을꺼야. 내가 봤더니 의자랑 탁자랑 다 그렇게 춤추고 있더라니까! 에스벨린은 늘 그랬던 것처럼 깔깔하고 웃어주었다. 어린게 벌써 버릇없이!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의 짖궃은 표정을 나는 참 좋아했었다.

이런 소란스러움은 무챠가 찌그러진 냄비를 치며 식사시간을 알릴때가 되어야 비로소 잠시 잦아들었다. 정작 식사시간이 시작되면 옆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지만. 무챠는 그저 묵묵히 음식을 날랐고 내가 음식을 나르겠다고 종종걸음을 치면 눈가에 주름을 잡아가며 빙긋 웃어주었다.

물론 말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벙어리였으니까. 그녀의 나라 말로 무챠는 벙어리라는 뜻이라고, 땅바닥 한켠에 나뭇가지로 서툴게 쓰인 글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그녀를 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우리 모두의 엄마였다. 어느 저녁 어스름 살며시 눈을 떠보면 누군가가 그녀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흐득흐득 흐느끼곤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맘놓고 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무챠도 우리 할머니를 따라 왔었다.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를 보고 모여들었다. 머리를 써서 이해하기에는 불가해한 인력. 할머니가 누군가를 쓰다듬어 주고 칭찬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챠처럼 묵묵히 달래주는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누군가의 잘못이 눈에 띄면 그야말로 눈물이 쏙빠지게 혼을 내곤 했다. 누구든 할머니의 꾸중을 듣고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할머니를 떠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어느 누구도 잊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누군가가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입가에 슬쩍 미소를 얹곤 했다. 그래, 나가보니까 괜찮든?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다. 다녀왔누? 그러면 그 누군가는 젖은 목소리로 겨우겨우 대답하는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무서운 할머니가 뭐가 좋아서 다시 돌아오는지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네가 아직 어려서 몰라. 룰렌은 그런 말로 애매하게 얼버무리곤 했다. 룰렌은 몇차례나 우리를 떠났었다. 항상 목소리를 높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외치곤 했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왔다. 그녀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내가 그랬더라도 할머니는 나의 물건을 때 절어 윤기 날 때까지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잠 없는 밤을 새었을 테니.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소리내어 하지 않아도 마음을 손길에 담으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야 나에게 돌아온 엄마의 거울은 무늬를 알아볼 수 없게 민숭민숭한 모양이었다.

룰렌은 죽은 할머니의 옷자락을 부여쥐고는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그래 이제 다녀오니라고 말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가셔요. 말을 좀 해봐요. 내 너 보기 싫어서, 이 꼴 보기 싫은 것들 다 싫어서, 그냥 내버리고 가니라고, 말해요. 이 정신나간 노인네야, 당신 보기 싫어서 나갔던 나 봐요!

그날 저녁에 불꽃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금가루같이 튀던 불꽃들. 발자국이 찍히도록 콱콱 밟아대던 숨막히던 발들. 축제에 나갈때나 입었던 옷가지들을 모두 끄집어내어서는 오히려 더 신명나게 흔들어대던 그녀들. 흐드러지는 웃음과 평소에는 마실 수 없었던 술의 독한 냄새와 고깃기름이 타는 냄새가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주 기쁜 날의 축제였다.

넘나드는 불에 할머니가 날았다. 잿가루 뼛가루 뽀얗게 앉으며. 저 너머로 가신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 날 따라 별은 아주 반짝이고,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불꽃과 함께 별이 저물고, 기억이 잠든다.


별이, 불꽃이, 불티처럼 흩어지고 나의 유년이 잠들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가끔 아주 어릴 때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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