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의 어느 한낮에 그림자없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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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2009/12/19 22:29 : Across the Universe/단편

안개는 흩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다소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질러버린 여행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꼬일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자꾸만 확인하게 되어버린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그 자신의 생각대로 풀리는 일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작게 말하면 학점에서부터. 수업 한번을 제대로 들어본 일이 없으면서도 요행으로 학점이 좋게 나오기를 바라지만 학점은 냉정했다. 아마, 취직같은 인생이 걸린 문제에서도 요행을 바라며 그저 멍하니 이력서 끄트머리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 인생에 제대로 부딪쳐보기 위해서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비행기표를 끊었지만 또 이렇게 문제를 마주하고는 멍하니 주저앉아 버렸다.

어차피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이고, 인생일지도.

몇 달간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도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던 그녀도 저기에 저렇게 앉아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그녀의 연인이었던 남자의 퉁퉁 불어버린 시체가 그녀가 팽개친 모양 그대로 굳어있다. 그 시체를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방치해 두고 우리는 한참 머쓱한 기분에 잠겼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였고, 그래서 우리는 열흘 전에, 안개가 걷힐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시체를 파묻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이런 짙은 안개 속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공기는 축축해서 불을 붙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은 불을 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다행히도 비행기 추락의 그 날 쏟아진 비로 당분간 식수 걱정은 없을 것 같다. 먹을 것을 찾아보는 것은 일찍 포기해버렸다. 말했듯이, 안개는 짙어서 내 손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먹을 것을 찾아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본다는 것도 물론 불가능했다. 나는, 우리는, 철저히 무기력했다.

잠으로 굶주림을 애써 잠재워보지만 어느 순간 잠들면 다시 눈뜰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애써 잠을 깨우곤 했다.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아니, 있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는 있지만 부분부분 살펴보면 제법 먹을 만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한번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 생각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나는 정말이지, 배가 고팠다. 살고자 하는 욕망같은 거창한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무엇이라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무엇이라도 입에 쑤셔 넣을 수 있을 만큼.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억누를만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농담을 건네던 친구라 해도.

아직은 혐오감이 굶주림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은 다르리라. 혐오와 굶주림이 뒤얽힌 막막한 심정을 잠으로 달래보기로 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내 친구의 시체는 여기저기 헤집어져 있었다. 나는 아니다. 이렇게 여전히 배가 고픈데. 이 한정된 공간에 사람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극한 상황에서 나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먹을 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먹을 만한 부분은 제대로 골라서 뜯어먹었구나 싶다. 나는, 정말로, 배가 고팠다.

다음 순간에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나는 먹어야 했다. 그 외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이제 무얼 망설이겠는가. 애초에 망설였던 것이 잘못이었다. 킥킥하는 기묘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사지를 경련하는 시체의 살갗을, 아마도 그녀가 그의 시체를 찢을 때 사용했을 작은 나이프로 푹푹 찔러가며, 나는 먹었다. 아아, 그래.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모양이지. 삶이란 것은.

그녀의 시체가 슬슬 뼈를 보일 즈음. 안개가 걷혔다. 이제 어떤가.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 안개가 걷혔지만, 내가 이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배가 부른데.

“이 녀석이 다 먹어버린 모양이지.”

동료 경관의 욱욱거림을 등지고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세 구의 시체는 성한 데가 없었다. 연기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미친놈 아닐까. 십분만 걸어서 나가면 마을이 있는데. 이런 데에 비행기 사고 피해자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 못했던 우리도 우리지만. 자, 철수하자구. 오늘 점심은 뭐더라?”

===========================

고등학교때 나와 그는 그냥 그런 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물론 그와 별로 친한 편이 아니었지만,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의 영향력은 지나치게 컸다.
사실 완전히 호감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그냥 그런 밍밍한 관계.
하지만 고3때 나와 그는 어머니의 주선으로 친해질 수 밖에 없었고
나름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그와 친해지는 것을 때려쳤다.
과 자체가 그와 별로 관계가 없고, 졸업하고도 딱히 친할 필요가 없어서.
수많은 시험장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철저히 무시했다.


어쩌면 모멸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나를 이렇게 짓밟은 것을 보면.

그의 이름은 '영어'군이며 나는 또다시 그와 타협해야 함을 느낀다 -_-


대학교 1학년때 소설 쓰기 숙제를 무척 싫어했던 나의 친구와
영어 자기소개 레폿을 너무나 쓰기 싫어했던 나는 협정을 맺고
서로의 숙제를 대신해주기로 했었는데 이 짧은 소설이 그 결과물이다.
'시체, 남녀 한 쌍, 고립'이라는 소재로 단편 소설을 쓰는 숙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쓰면서 이것저것 더 덧붙여야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새삼 뭘 더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것은
내가 그때와 마음가짐 자체가 상당히 판이해져서
주섬주섬 덧붙이는 것이 전혀 다른 소설을 쓰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
그때 그, 실존을 위해서는 뭐든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던 굶주림은 이젠 없지만

아직도 가끔은 헛헛함을 느낀다.
 

 
2005년에 썼던 글.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구조'의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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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성냥팔이 소녀가 생의 마지막에서 겨우 즐길 수 있는 화려한 환상 같은 것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갔을 때를 이야기했다. 밖으로 나가면 이런 걸 할꺼야. 사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담배지, 밖에 나가면 면세점에서 담배를 면세한도까지 사서 잔뜩 피우는거야. 이런 작은 방 같은 건 담배연기로 채우는 것도 금방이거든. 방을 담배연기로 가득 채우고 연기로 된 도넛도 만들고 그런 것들을 해야지. 애들이 그런 걸 보여주면 정말 좋아하거든. 마누라는 별로 안 좋아해. 건강 생각해서 빨리 끊으라고 하지.

혹은 무엇을 먹어야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변질되어가는 음식을 조금씩 입에 떠 넣으며 음식을 이야기한다. 왜, 부침개를 바작바작 튀겨서 그 가장자리만 먹는 거야. 그런 다음에 가운데부분을 먹어야지. 부침개는 가장자리가 맛있잖아. 김치랑 오징어랑 송송 썰어넣고 그걸 확 달아오른 후라이팬에 착 올려서 자글자글 지져가지고 뒤집개로 탁 뒤집는거야. 그러면 뒤도 노릇노릇하게 익잖아. 그게 식어서 눅눅해지기 전에 빨리 먹어야지. 애들이 그거 정말 좋아하거든. 접시에 올라오기도 전에 전부 젓가락 들고 기다리고 있어서 가장자리 먹기도 힘들어. 여럿이 있으면 자기 먹고 싶은걸 양껏 먹기 힘들지. 왜 통닭 시키면 닭다리가 두 개밖에 없어서 애들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랬는데.

아니면 나갔을 때는 인기 시리즈인 책의 뒷이야기가 나와 있을까? 완결을 얼마 앞두고 있어서 전 세계를 흥분하게 했던 그 요란한 시리즈의 결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하면서 말하는 내용은 책의 주인공과 등장인물이 억지스럽게 모두 행복해지는 내용이었다. 애들이 이 사람은 사실은 죽지 않은 거라고 그랬지. 밤에 읽어주면 그렇게들 얘기를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말을 해줘야 해. 마치 그들이 쓰인 이야기의 마지막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듯이 몇 번이나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이야기를 새로 쓰면서 누구도 조금도 불행하지 않은 이야기를 천천히 만들어간다.

조심스럽게 가장 따뜻한 낮 시간에 조용조용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나갔을 때를 이야기한다. 아이들과 부인이 있는 따뜻한 풍경으로 작은 공간을 환하게 채워본다. 환상으로 배를 채우는 것처럼, 성냥팔이 소녀가 타인이 볼 때는 무의미하게 계속 성냥을 긋는 것처럼, 나갔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 한낮의 일과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저 먹고 잘 뿐이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력만을 남기고 동면하듯이 잠들었다. 그러나 식량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남은 것은 오랫동안 남아있는 기아의 고통뿐이었다. 굶주림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또한 고통스런 죽음뿐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좀먹어간다. 사실은 구조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사 새로이 부질없는 희망을 더하여 남은 목숨을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의 의욕이 꺾이자 생명 또한 빠른 속도로 시들어갔다.

남자는 마지막 숨을 쉬듯이 말을 새겼다. 말로 묘비를 세우듯, 단단하게 말을 세운다.

"이게 마지막인 거겠지."

붓끝을 꼿꼿하게 다듬는 듯한 정성으로, 그는 마지막이 될 말을 단정하게 준비한다. 준비가 끝나고 마침내 획을 긋듯이 말을 할 때가 되었다.

"사실 내 가족들은… 전부 저 밖에 있어. 약속이었거든. 올해 여름에는 다 같이 다른 나라에 가자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한국에는 없는 색깔 바다도 보여주고 외국인들이랑 외국말로 얘기도 해 보자고."

솟구치는 울음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소리가 꿀꺽하고 들렸다.

"사실은 나가고 싶지 않았어. 나가도 저 밖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거기에 있지 않다고. 또 다시 함께 웃으면서 여행을 계속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어."

눈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 안의 다른 풍경을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살아남았으면 좋겠어. 살아서 가족을 만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여기에 있어야겠지. 사실은 떠나고 싶지 않았어. 내 주검은 저 바깥에 던져 주었으면 좋겠어. 그게 마지막 부탁이야. 함께 있고 싶어."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 사실, 봤어. 당신이 바라보던 창 밖에 무엇이 있는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손을 쥔 손바닥에는 촉촉하게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가 경련하듯이 움찔 움직였다.

"응, 당신은 살아서 가족을 만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아주 많이."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구조대가 저기에 와 있으니까, 그것도 오래 전부터. 그렇지."

마지막 목소리는 한숨소리같이 꺼져갔다.

"그런데 왜 나가지 않았을까.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그냥 처음부터 저 밖으로 나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신은 저 밖에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 있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남자의 손이 마침내 떨어지고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눈 속에서 빛이 꺼지는 모습을 지긋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마침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물어볼까봐 남아있었어요. 누군가가 어떻게 나가야 할지 물어볼까봐."

여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아직 따뜻한 남자의 손을 잡고 여자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잖아요. 아무도."

남은 여자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매듭을 푸는 것은 오래 걸렸지만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예의 그 형광색 겉옷을 두어번 털어 주름을 펴고 팔을 꿰고는 문을 열었다. 철문 앞에 죽어있는 남자의 시체 때문에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조금 힘들었지만 며칠이나 그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동강난 비행기 위에 잔뜩 쌓여있던 잔해를 헤치고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잔해 때문에 그들이 있었던 곳은 밖에서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오랫동안의 금식으로 수척해진 몸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수척해진 여자가 남자의 시체를 끌고 나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남자의 시체를 남자의 좌석이 있던 자리로 옮겨놓고

잠시 그들이 있던 작은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첫날 위치를 확인해두었던 구조본부가 있는 곳을 향하여 발을 옮겼다.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만이 방 안에 남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용돈벌이를 위한 사악한 목적으로 학교 공모전에 냈던 소설.
의도의 불순함인지 작위적인 대사처리 때문인지 용돈벌이에 실패했다.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 끝내는 나갈 수 있어도 나가지 않는,
그 심리를 설득시키는데 얼마간 실패했기 때문일지도.

그러나 나는 이 글에 만족하고 있다.
내 마음이 언젠가 그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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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물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줄어가고 있었다. 식사는 하루 두 끼에서 한 끼로 줄었다. 이제 아무도 구조대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할수록 희망은 무서운 속도로 부풀었다. 혹은 어쩌면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모두들 각종 수식어를 붙여 머릿속으로 각종 가설을 꾸며가면서 구조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할만한 최소한의 음식덕분에 사람들은 쉽게 허기졌고 그만큼 정신은 예민해졌다. 하루하루는 모든 나쁜 가능성에 대한 상상들과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불가능한 일들에 대한 망상으로 채워졌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리에 누워있는 것으로 그악스런 허기를 면하고 말을 줄여서 기운을 아꼈다.

작은 안식처는 침묵에 잠겼다. 그것은 처음의 침묵과는 질감이 다른 침묵이었다. 감당못할 감정에 허덕이며 자신을 안정시키는 데에 온 체력을 소모하던 그 무거운 침묵과는 다른 것이었다. 침묵은 얇고 파삭 깨어질 것 같은 긴장감을 안고 있었다. 누군가가 무엇을 말해도 쉽게 싸움이 날 것 같은 예민한 공기가 나날이 서로를 아프게 자극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식량은 점차 줄어들었고 이제 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먹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을 늘릴 수 없다면, 먹는 사람을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안식처가 있는 듯한 고산지대에 폭우가 내리는 밤이었다. 천둥소리는 고막이 아니라 온 몸을 진동시켰다. 벼락이 칠 때마다 드러나는 얼굴들이 유난히 선명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예의 그 형광색 겉옷은 그 벼락 속에서도 눈에 아로새겨지듯 선명했다. 비명과, 살해자의 의지를 담은 고함과, 천둥소리와 그 모든 것들이 얼룩지듯 뒤섞였다. 자기 손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둠과 망막을 태울 듯 작열하는 빛이 수없이 교차하는 동안 그 모든 일들은 꿈 속 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결국 살해하고자 했던 사람은 남은 두 사람의 필사적인 저항에 의하여 문 밖으로 밀려나갔다. 음식도 물도 없는, 시체들로 가득한 저 밖으로.

"살려줘… 안으로 들여보내줘… 여기는 싫어… 시체가 있어… 안으로 들여보내줘…."

처음에는 분노와 노여움으로 문을 두들기던 남자의 목소리는 점차 애원으로 바뀌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려줘… 살게 해줘…."

나직한 흐득임이 빗소리를 뚫고 들어왔다. 남은 사람들은 그 모든 애원을 차게 외면했다.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음식을 늘릴 수 없다면 사람을 줄이는 것이 옳다. 언제 그들을 죽일 지 모르는 사람을 안에 들일 수는 없었다. 없는 체력에 격하게 움직이고 오래 흐느꼈던 때문일까. 흐득이는 소리마저도 점차 줄어들어 무엇도 들리지 않는 공황처럼 찾아온 고요의 끝에서 까드득하고 무언가 뾰족한 것으로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찌이익, 찌이익, 찌이익. 다섯 개쯤 되는 얇고 뾰족한 것으로 고요를 찢는 소리.

마치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소리와 함께 소름이 솟아올랐다. 소리는 찌이익, 찌지익, 찌이익, 하고 발작적으로 양 손으로 철문을 긁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저 밖에 썩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저 밖에 죽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소리는 절규하고 있었다. 살아있다고, 살고싶다고, 살려달라고.

문득 무언가가 탁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찌이익, 찌이익, 찌이익, 탁.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을 긁는 소리는 계속 되었다. 누군가가 지르다가 질식해버린 비명처럼 꽉 막힌 방 안에 울리는 신경을 긁는 소리였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오랜 시간동안 문을 긁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도 스치는 바람소리마저도 희미해졌고 마침내 그쳤다. 그 동안 사람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소리가 그치자 그제야 사람들은 물을 마셨고, 밥을 먹었다. 이전에 세 명 분으로 꺼내지던 음식이 두 명 분으로 줄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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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능한 한 서로에게 상냥하려고 했다. 그것은 묵묵한 배려나 수줍은 친절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물을 건네준다던가, 젓가락을 가지런하게 쪼개준다던가 하는 모양의 상냥함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유일하게 가족이었던 중년의 부인은 그녀의 남편에게 유난히 불친절했다. 초반부터 여행의 원인을 남편에게 돌리던 그녀는, 남아있을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입에 올리다가도 자식의 불운을 빌미로 그를 힐난했다. 아마도 그들은 비행기를 타기 전에도 그러했으리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습관과도 같았을 그 비난이 치명적이었던 것은 그가 죽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곧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이 쓸모없는 것, 차라리 뒈져버려!"

욕설을 비명처럼 외치는 부인의 목을 가차없이 눌러 조르는 그를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것은 어떤 상냥함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그를 동정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물을 건네준다던가, 젓가락을 가지런하게 쪼개준다던가 하는 모양의 상냥함이었다. 그에게 예의 그 형광색 나이롱 겉옷을 건네준 것도 그런 친절함이었다. 형광색 겉옷에 의해 잘록하게 목이 졸린 채로 마지막 힘을 다하여 부인이 휘두른 포크가 남편의 숨골에 박힌 것은 의도인지 우연인지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평생의 과업을 이루었을 남자의 마지막 표정은 유난히 평온했다. 그들은 상냥하게 그의 부인과 그를 멀리 떨어지게 내어보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 명분의 음식을 꺼내어 물을 마셨고, 밥을 먹었다

무료와 공포에 지쳐서, 사람들은 조금씩 발랄해졌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가족들을 잠시 이야기하고, 혹은 구조대가 곧 올 것이라는 화제를 입에 올리기도 했다. 문득 웃기도 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잘못 알아듣고 영 엉뚱한 소리를 했을 때였다. 웃음은 금방 멈췄지만 웃음의 여운은 오래 남았다. 새장같이 좁은 안식처 속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데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놀라게 했다. 앞으로에 대한 기대 때문도 아니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실에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어쩌면 이 안에서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누군가는 잠시잠깐 생각했다. 만약 살아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누군가는 생각했다.

말은 부지불식간에 입에서 튀어나왔다. 너무 오랫동안 생각해서 입 밖으로 튀어나간 후에도 그것이 생각일 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오랫동안 입안을 맴돌았던 말이었다.

"어차피 나가지 못하더라도 같은 거겠지."

생각은 말로 토막쳐져 내던져졌다.

"응, 여기가 집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지."

안온한 머릿속에서 내팽개쳐진 생각이 파닥파닥하고 몸부림을 친다.

"결국은 죽는 게 아니면 사는 것뿐이지. 어디든, 어디에 있든."

토막난 생각이 마지막으로 파드득하며 경련하는 것처럼 말이 맺어진다. 죽은 생각, 죽은 말. 누구에게도 아무 의미를 맺지 못하는 심상들이 파르르 떨리는 공기 속에서 숨을 멎는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말은 스쳐지나가고 그 잔상만이 뇌리에 남아서 부질없이 그림자를 떨군다.

누군가가 죽은 말을 주워서 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 말이 가지는 섬뜩한 질감이, 그를 퍼뜩 깨어나게 했다.

"나가지 못하더라도 같은거에요."

귓가에 서늘한 입김을 불어넣듯이.

"여기가 집이라고 해도, 다를 것도 없지요."

목 뒤에 서늘한 손을 올리듯이.

"어디에 있어도 결국은 사는 게 아니면 죽는 것 뿐이에요."

부지불식간에 지나쳐가 소름을 끼치게 하는, 무언가 모르는 희미한 그림자처럼.

"하지만 이 안에만 있다면 죽는 것 뿐이겠지요."

살아만 있으면, 행복할 수도 있다고, 죽은 말들이 돌아와 접어둔 생각을 일깨운다. 살아만 있으면, 행복할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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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안도하고 혹은 슬퍼하고 절망하는 일들에 온전히 하루를 소모하느라 바빴던 사람들도 감정의 격렬함이 잦아들자 차차 현실적인 초조함을 느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정말 알고 있을까? 비행기가 떨어진 지점을 정확히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왜 도대체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구조대는 오지 않는 것일까? 사실 조금만 더 찾아보면 근처에 민가나 혹은 마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과 의혹들은 마치 불씨처럼 밟아서 끄려 하면 할수록 번져나갔다. 누구도 입을 열어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의 의문은 끝내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저 밖에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도무지 저 두꺼운 철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안에는 물과 음식이 있다는 것, 함께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밖에는 시체들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제 시체는 그들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주는 죄책감보다는 썩어가기 시작했을 그 흉물스런 모양새로 공포가 되었다. 누군가가 공기를 바꾸자며 문을 열었을 때 순식간에 밀려들어온 그 시체냄새를 잊고 밥을 먹을 때 까지는 며칠이나 되는 시간이 걸렸다. 먹는 음식에서마저도 시체냄새가 나는 듯 했다. 결국 배고픔을 이기지 못할 때 까지 그들은 말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먹지 못했다. 시체들 사이를 가로질러서 더 멀리까지 나가야한다는 것, 그것이 그들이 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람들로 인해 공기가 눅진하게 달아오르면 그것은 또한 시체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밤중에 소스라치는 공포에 눈을 뜨면 이불 대신으로 덮었던 옷가지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의 냄새는 뱃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비명을 끌어내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아 윤곽으로만 느껴지는 타인의 몸뚱이들은 시체 같아서 두렵다. 죽음에서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생, 혹은 죽음을 예비하기 위해 남겨진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산 시체의 냄새로 가득한 공간에서 묵묵히 견디어나간다.

그들 중 유난히 심하게 다쳤던 여자가 끝내 목숨을 잃은 것은 다음날이었다. 진지했지만 길지는 않았던 초반의 대책회의에서 그녀는 자주 거론되었다. 어차피 그녀의 부상은 생명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녀에 대한 화제는 주로 이런 것이었다.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식사를 좀 더 하는 게 좋을 거에요."

"네, 부상을 회복하려면요."

"아, 부상을 회복하자면요."

그렇게 말하는 모두는 그녀의 부상이 회복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장이 보일정도로 심한 상처를 단단히 동여매고 구조를 기다리던 그녀도 조금씩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요구에 짓눌려갔다. 처음에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 마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음식을 먹고 물을 마셨으나 조금씩, 조금씩, 음식을 남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일이 늘어났다. 결국 음식을 먹는 일을 포기한 그녀를 다른 사람들은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다. 여자가 눈을 뜨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모두들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눈을 뜨고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곧 죽을 그녀에게, 음식과 물을 나누어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준 것에 대해서 아주 감사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죽은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사람들은 다섯 명분의 음식과 물을 꺼내어 조용히 나누어 먹었다.

식사의 와중에 한 남자가 해묵은 습관처럼 아무 내용도 아닌 말을 꺼냈다. 대화로 이어질 만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흔한 내용의 짧은 문장이었다. 다음과 같이.

"음식이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추운 곳이니까 당연하지요."

"추운 곳이라 다행인가, 그럼."

"다행일리가요. 이렇게 추운데."

"아, 그래. 밤에는 견디기 힘들어.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지."

"그럼 시체들이 더 빨리 상했겠지요. 저 냄새는 정말 역겨워."

"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체가 빨리 상했겠지. 응. 그랬겠지."

"그럼요. 뭐라고 생각하나요."

"응, 그렇지. 그랬겠지."

두 사람은 해묵은 습관처럼 대화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배재하듯이, 짧은 간격으로 이어지는 대화에 다른 목소리가 더해졌다. 다음과 같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요?"

"당연하죠! 말이라고 해요."

"응, 그래요. 그렇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요?"

"똑같은걸 몇 번을 묻는 거지요? 그렇다니까."

"...그렇게 생각해야지. 그렇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요?"

"정말 얘기하기 어려운 사람이네. 됐어요."

"...나는 추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왜 그렇게 얘기하지 않나요?"

톡톡톡톡, 여자의 손가락은 초조함을 드러내듯 연신 바닥을 두드렸다. 그것을 배경으로, 남자의 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과 같이.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나를 다치게 하니까. 그러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그 말들은 당신의 안에 넣어두는게 좋겠군요."

그리고 모두들 밥을 먹었다. 조용한, 침묵을 입 안으로 밀어넣는 것 같은 묵직한 식사였다. 이전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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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다른 사람들은 남자의 시체를 문 밖으로 내보냈다. 나이롱으로 만든 질긴 형광색 겉옷은 그의 무게만큼 단단하게 매듭지어져서 결국 남자가 목을 맸던 자리에 걸어둘 수밖에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여섯 사람 분량의 식사와 물을 꺼내서 묵묵히 먹고 마셨다. 더 이상 밖으로 나가보자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밖에는 시체들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제 목숨을 연민하기 위해서는 바깥에 패대기쳐진 죽음들을 외면해야 했다. 살아남아있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저 많은 목숨을 이고지고 살아야 하는 날들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자신이, 죽어있는 그들보다 더욱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도무지 저 혼자 살아있는 자신을 감당할 수가 없으므로.

음식과 물은 신중하게 최소의 분량으로 나누어졌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큰 사고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구조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하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주 장기간 그 안에 있을 것을 생각해서 음식과 물은 필요한 만큼만 아주 조금씩 먹어야만 했다. 음식과 물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둥글게 둘러앉은 한가운데에 두었다.

마치 고깔 모양의 과자를 열 손가락에 하나씩 끼워놓고 순서대로 빼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누군가는 생각했다. 몹시 어울리지 않는 비유였지만. 누군가가 빼앗아먹지 못하도록 자기 손가락에 욕심껏 과자를 끼우고 그것을 등 뒤로 숨기는 것과 같은 배식이었다. 음식의 종류와 분량을 계산하여 모든 것들을 조금씩 나누어두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손가락이 열 개밖에 없다는 것을 잊고서 한줌 가득 과자를 챙기는 것 같은 무의미한 탐욕이었다.

처음의 며칠간은 하루 온종일 그 음식 무더기를 보다가 문득 잠들고 또 일어나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무엇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배도 고프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누군가가 식사를 제안한다. 그러면 약속된 분량만큼의 음식을 모두 조용히 나누어 먹는다. 어두워지면 자는 듯 마는 듯,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어둠 속을 응시한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유난히 따가운 아침햇살이 잠을 깨우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묵묵히 음식을 먹는다. 그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집에 있는 꿈을 꿨어."

그러므로 누군가가 잠꼬대처럼 입을 열었던 밤은 모두에게 꿈처럼 기억되었다. 여자의 졸린 듯한 나직한 목소리는 다른사람들이 잠을 재촉하듯 높낮이 없이, 끊어짐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꿈 속의 꿈 인듯 이야기 속의 풍경이 어두운 눈꺼풀 속에 파리하게 불을 밝히고 다음의 말을 재촉한다.

"집에 있는 꿈. 왜 엄마랑 동생들 있고, 강아지도 있고. 현관에는 아직 물이 촉촉한 화분도 있고. 그 화분이 내가 키우는 화분인데 다른 사람이 키우던 나무에서 꺾꽂이 받은 거야. 근데 그게 화분에 꽂아놨더니 쭉쭉 자랐어. 물을 많이 줘도 안 되고, 그냥 마를 때 마다 조금씩 줘야 하는 화분인데. 흙을 적시는 느낌으로. 그거 내가 키우는 거라서 다른 사람들은 손도 못대게 했었어, 그 화분이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 근데 꿈에 그 화분이 나왔어. 파릇파릇하게. 나는 그 화분에 물을 주고 있고 엄마가 휴일에도 화분만 끼고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 만날 생각도 안한다고 막 화내고. 동생들은 그냥 자기들끼리 놀다가 막 웃고. 그리고 나는 화분에 물을 또 주고. 그런 꿈을 꿨어."

이야기의 끝에 남은 여운에 하나의 파문을 던지듯이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왜 다른 사람들하고는 만나지 않아요?"

"그냥. 매일 사람들을 만나는데 노는 날도 만나야 하는건 피곤하니까."

"사람들을 만나는 건 노는게 아닌가요?"

"사람들을 만나려면 화장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옷도 골라야 하고."

"그냥 편한 옷을 입고 만나면 안되나요?"

"아니... 그러면 그 사람들이 나를 허술하게 생각할테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요?"

잠깐 숨을 고르는 듯한 나직한 한숨소리.

"화장도 치장도 하지 않은 나는 아주, 평범하니까. 그러면 아무도 나와 만나주지 않겠지."

"그래요.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주 힘들겠군요."

그것으로 대화는 그치고 내용보다는 운율로 그 대화를 감상하던 사람들은 다시 무엇도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 내던져졌다. 꿈 속의 꿈은 끝나고 다시 온통 어둠으로만 이루어진 꿈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타인의 손끝 하나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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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여 동강난 비행기의 철문으로 닫힌 퍼스트클래스 안에 사람은 모두 일곱이었다. 바깥은 민가 하나 없는 차가운 산 속이라고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들을 부축하여 이 작은 방에 모여 그들의 온기로 서로를 데우고 있었다. 의사는 없었다. 살필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상처 뿐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치료를 할 방법도 없었다. 물과 식량은 충분한 것처럼 보였지만 누군가의 지적처럼 언제 구조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일렀다. 기내에 있던 짐들에서 꺼낸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옷가지를 겹겹이 껴입고 둥글게 둘러앉아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사람이 일어날 때마다 일행에서는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마지막 사람까지 깨어나자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약간의 기쁨도, 약간의 슬픔도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창 밖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나머지 여섯의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새기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상을 기억한다.

남들이 보기에도 지나치게 큰 상처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본인은 극구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괜찮지 않아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얼굴이라던가 말투라던가 그런 것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 상처로만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누군가가 그 사람에 대하여 물어보면, 음, 상처가 컸어, 외에는 그렇게 말할 것이 없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부부가 있었다. 말을 하지 않는 만큼 그들 사이의 긴박한 감정이 더 진하게 전해지는 그런 부부가 있었다. 떨어진 속눈썹이 부인의 이마에 붙어 있는 모습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뭇 희극적인 광경이었지만 그것이 빤히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던 남편은 그 속눈썹을 떼어 주지 않았다. 남편의 눈가가 웃는 것처럼 실룩 움직였다.

토끼같은 느낌을 주는 남자도 있었다. 불안을 찾아 쉴 새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러나 무거운 몸 때문에 불안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없는 집토끼처럼 무기력한 인상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토끼가 끊임없이 풀을 삼키는 것처럼 하염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이 다른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는 데가 있는 남자였다.

기묘할 정도로 조용한 남자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 대신에 끊임없이 옷가지를 추스르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동작으로 자신의 초조와 불안을 표현하고 있는 가운데 양반다리를 하고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너머에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혹은 그의 눈 속에 있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침묵을 깬 것은 체격에 비해 수척한 남자였다. 알이 깨진 안경을 걸치고 있는 그의 눈썹 위에는 피딱지가 엉겨붙어있었다.

"도움을 요청해야 해요."

안경 때문인지 유난히 눈 아래에 그림자가 깊이 드리운 남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입만 움직여 침묵을 깨트렸다. 사람들은 말의 내용보다는 말 자체에 화들짝 놀라 그를 주목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근처에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없을지도 몰라요."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아. 우리는 나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해요."

묵묵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남자가 말을 꺼내기 전에 누군가가 나직하게 말했다.

"문은 어차피 안에서 잠겨있어요. 나가는 건 상관없지만."

그것은 잊으려고 했던 공포를 깨우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밖에는 시체들이 있어요."

끈덕지게 무엇을 계속 말하려던 남자의 얼굴이 그 모양 그대로 굳었다. 그의 대답을 채근하는 것처럼 차근차근히,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말했다.

"그 중에는 당신 부인의 시체도 있어요."

남자는 숨이 모자란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 소리없는 절규가, 퀭한 눈이, 유난히 선명한, 그의 것이 아닌 우스꽝스러운 형광색 겉옷이, 그를 마치 금붕어처럼 보이게 했다.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퍼덕이는 금붕어 같았다.

"당신 밑에 깔려 죽은, 덕분에 당신을 살린 아내의 시체가 저기 있어요."

쥐어짜인 금붕어가 입으로 내장을 토해내는 것처럼 남자의 입에서 비명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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