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의 어느 한낮에 그림자없는 몽상가

"먹는 것으로 나의 삶을 확인하는 것이 그토록 야만이라면,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의 삶을 확인하고 나에 대한 우월을 주장하는지, 말해봐.

남의 죽음으로 나를 살리는 것이 당신에겐 티끌만큼의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마. 남의 목숨을 짊어지고 나는 오늘을 살아. 그것은 나를 살게 하는 하나의 힘이고, 그리고 나에게 살아야 할 이유는 그것밖에 없어. 남의 목숨 만큼 지독하게 오늘을 살지. 너를 먹음으로 해서 나는 살아있게 되는거야. 그것이 나를 살리는거야.

나는 그저 살기위해 존재하는 목숨이야. .살아남을때까지 살아남아서 그리고 끝내는 살아남아서 존재하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야. 그것으로 나는 존재하고, 존재해서 나는 가치를 가지게 되지. 그저 존재함으로써. 그저 살아남음으로써. 그저 있음으로 해서 나는 살아있게 되는거지. 그리고 그 삶이란 나에겐 먹는 것으로 해서 주어지고. 그걸 알겠어? 그걸 안다면, 당신은 나를 비웃어서는 안돼."

소년에게 이름을 주고 생명을 부여한 마녀.
혐오와 뒤틀린 공포와, 침묵.
눈을 감아버린 사랑. 돌아보지 않는.

the Witch


"먹는게 먹힐 수 있는 건 당연하지."

소년은 말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적잖은 시간 동안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 말을 고르지는 못했는지 말은 중간중간 머뭇거렸다.

"이해하기 쉽지는 않을거야. 당신은 잡아먹어보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보통은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음, 정말 길어서 당신의 생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그런 아주 오랜 시간동안 돌아가는 그런, 음, 과정? 순환? 그런거지. 당신이 먹는 것에게 당신은 언젠가 먹이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알수 없겠지만, 그게 나에게는 매 순간이야. 그런 순환이 당신들이 보기에는 너무 빠른,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버리는거야.

인간보다는 동물에 가까울 지 몰라.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사냥을 할 때는 어떤 동물이라도 먹을 것, 먹잇감? 그래, 먹잇감에게 죽임당할 수 있어. 목숨을 얻기 위해서 사냥을 할 때에는 반드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라는거야 . 그건 사실은 당신들도 마찬가지지만 당신들은 직접 손으로 먹잇감을 쥘 일이 별로 없겠지. 그래서 당신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거야. 나는 내가 언제 죽어야 하노라고 정해둔 적이 없어. 그런 점에서 당신들은 우리와 달라. 당신들에게는 수명이 있지. 우리에게는 목숨이 있고. 그런 아주 작은 차이가 당신들과 우리들을 갈라놓은거야."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은 훨씬 격정적인.
넘쳐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 안에 가두어버린.
그래서 언제나 냉정하게 타인을 외면하지만
언제나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하고.
살짝 내리 깐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 하지만
제대로 들여다 보면 아마 놀라게 될거야.
아주, 깨어지기 쉬운 눈동자를 한 소년.
입을 여는 데에도 신중하지만 내뱉는 말들도 시간을 들여 골라낸 것들.
그 말들에서 얼핏얼핏 드러나는 정체와 정의에 대한 불안들.
그의 누이는 무엇에도 집착을 두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도 없지만
소년은 정말이지 성실해서 쉽게 집착하고 쉽게 두려워하지.
누이는 동경의 대상이되 지표가 되지는 않을테고,
하지만 그가 자랄 때 까지 그를 감싸안는 막이 될테지.
언젠가는 제대로 된 어른이 될, 그런 소년.
그 전에 제대로 한번 깨지게 될 테지만 그는 충분히 그걸 수습할 수 있으니까.
the Boy


"죽은 것을 먹고 사는 놈들에게서 시체 비린내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깨끗한 척 하지 마라, 너도 역겨워."
the Tracer

'Across the Universe > Theodo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o, Heather, Jude  (0) 201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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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문제가 아니야. 나도 그게 소문일 뿐인건 알아."
 "...그럼 뭐가 문제인데."
 "말하기 싫어."
 "말을 안 해주면 뭐가 문제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황소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방금 전까지 싸고 있던 짐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영민한, 능력있는, 존경받는 마녀라는 이름도 막상 싸울 때는 별 의미가 없어서 그냥 떼쓰는 보통의 여자같이 굴게 돼버린다. 이런 식으로 말을 끊는 것이 좋은 식으로 해석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여기서 참고 달래듯이 말을 하는 것이 어른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왈칵 화를 내는 것이다. 나중에 후회할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 그나마 어릴적보다는 나은 일일까. 냉랭한 침묵이 잠시간 둘 사이를 스쳤다.

 대화가 억지로 끊어지는 덕에 튀어나오려던 말은 삼켜졌지만 오히려 화가 치밀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결국은 그녀를 이길 말을 도무지 준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모진 말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무엇 하나도 그녀처럼 지능적이고 잔인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가장 치명적인 한마디를 고르지 못한 소년은 한참 씨근대는 숨을 고르다가 소리쳤다.
 "뭐가 내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진짜 이것만은 못 참겠다. 잘잘못 가리자고 하자면 그것부터 좀 어떻게 해봐. 솔직히, 진짜 솔직히 얘기하자면, 너 화낼 때 콧구멍 벌름거리는거 진짜 심한 거 알아? 제발 코 좀 가리고 말해주면 안되냐?"
 "뭐?"

 황소는 기가 막혔다. 얼떨결에 코 부분을 손으로 엉성하게 가리고 잠시 생각하니 새로운 분노가 치밀었다.
 "뭐야, 지금이 그런 말을 할 때야? 너, 괜히 내가 화내니까 성질내는거지? 너 아직 내가 뭣 때문에 화를 내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면서 자꾸 쓸데없는 거 끌어다 붙이지 말아줬으면 해. 좀 우리 대화에 집중하자."
 "말도 안 해주는데 니가 어떻게 화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 진짜 코 가려도 보인다고, 좀 자알 좀 가리라고, 잘."
 "아 진짜,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
 "아, 네, 유치해서 아주 죄송합니다. 이게 내가 잘못한거야? 아아, 그래그래. 유치해서 진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아, 황소 선생님."

 마지막 말을 입까지 삐죽이면서 말하는 것을 보면서 황소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어쩜 저렇게 사람 화를 돋구는데 천부적일까. 정말 입을 찰싹찰싹 때려줬으면 좋겠다. 아주 찰싹찰싹 입술이 부르틀 때까지. 얄밉게 구는 태도에 더불어 내심 신경쓰던 부분을 지적받은 것에 상처받은 부질없는 자존심이 이성의 저편에 차갑게 잠들어있던 분노에 불을 지폈다. 황소는 야무지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하, 그따위로 말하자면 말이지, 너도 발냄새 진짜 심하거든? 발은 좀 방 밖으로 내보내고 얘기하자. 아, 진짜 공기 탁해지는거 완전 달갑잖거든?"
 "뭐?"

 황소가 이런식으로 반격하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소년은 엉겁결에 발을 들어서 냄새를 맡을 뻔했다. 발을 올리다 마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당황과 함께 수습하면서 새삼스런 분노가 타올랐다.
 "너... 진짜..."
 "너 진짜 뭐? 내가 진작에 좀 그쪽 관리 하라고 몇 번 얘기 했잖아. 평소 생활습관만 약간 고치는 걸로도 꽤 많이 좋아질거라고 그랬지? 어머, 진짜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지금 와서 이렇게 남의 방에서 공기나 오염시키고 막 그래."
 "솔직히 니가 그런 말 언제 했어!"
 "했어. 그것도 아주 많이."
 "나 들은적 없거든요?"
 "어머나, 귓구멍도 막히셨나봐. 그러게 내가 평소 위생관리 좀 잘 하시라고 그랬잖아요?"

 새치름하게 고개를 돌리는 그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소년은 어금니를 부드득 갈았다. 정말이지,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한다니까. 금방 저렇게 대꾸하는 것 보라지. 게다가 그것도 맨날 자기한테도 얘기해서 도와달라고 할 때마다 귀찮다고 안 해주던 신체적 약점을 꼬집어가면서. 꼭 자기한테 약한 부분을 보이면 그것 보라고 얘기하면서 잘난 척하더라. 새삼스럽게 황소와의 대화에서 일방적으로 초라해지기만 했던 자신의 비굴한 처지에 더불어 평소 병적으로 신경쓰던 부분을 지적당한 슬픔이 그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슬픔을 눈꼬리에 반짝반짝 매달고 소년은 절규했다.

 "그래, 니가 자꾸 코를 벌름거리니까 냄새가 유난히 잘 나기는 하겠지. 그래서 그런거지 난 아까 발 씻었어. 씻은지 얼마 안 됐다고. 난 아무리 생각해도 니 코가 좀 이상한 것 같아. 그렇게 유난스럽게 벌름거릴 때부터 난 니 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지금 얘기하는거 보니까 냄새도 막 지어내나보다. 너야말로 어떻게 치료를 좀 받아봐라. 마법사가 제 신발끈 못 묶는다고, 그거 괜히 나온 말이 아니거든!"
 "어디서 마법사 타령이야, 마법사 타령이! 이게 지금 마법사가 나올 문제야? 아침저녁으로 제대로 뽀독뽀독 씻기만 해도 되는 문제를 괜히 신체적 이상으로 부각시켜가지고는 눈코 뜰새없이 바쁜 사람 오라가라 하질 않나, 지금은 그게 자기 문제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남 탓이야. 아니 그럼 니 발냄새에 괴로워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코를 벌름거리니? 너만 빼고 다 코가 병신이야? 핑계를 대려면 좀 제대로 대던가. 그게 말이 되니? 진짜 정말이지 유치 쌈싸먹겠어."
 "....진짜 말 말자. 너랑은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남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야 말을 하지!"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넌 정말이지 너밖에 모른다니까. 대화가 안 돼, 대화가."
 "정말 그만해, 이 코쟁이야!"
 "너야말로 좀 그만 하시지, 이 발냄새 대마왕아!"

 이후 수많은 시간동안 서로의 신체적 약점을 공격하는 비정한 대화가 시끄럽게 오갔다. 앞뒤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 대화의 끝은 항상 발냄새와 코를 언급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고 점차 대화의 전후가 생략되어 코와 발냄새에 대한 단어만이 남아서 언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더 이상 언쟁이라고 말하기 무안한 지경이 되어가자 황소는 마침내 크게 화를 냈다.

 "너, 너, 진짜 너랑은 나 얘기 안 할꺼야. 너랑은 진짜 끝이야!"
 결국 황소가 반지를 뽑아서 탁자에 내려놓고 씩씩거리며 방을 뛰쳐나가면서 싸움은 극적으로 파탄이 났는데, 반쯤은 울먹이면서 복도를 달리는 황소는 물론이거니와 소년에게도 기쁨보다는 발냄새에 대한 미묘하고 은근한 거슬림과 짜증스런 우울만이 남았다. 겨우 코 얘기 몇마디 했다고 이별 선언이라니, 쟤가 갑자기 왜 저러는거야? 솔직히 이 언쟁으로 더 상처받은 것은 나라고, 소년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혼란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울적하게 뛰어나온 황소는 자기 방에서 자기 발로 걸어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불러서 쫓아내라고 할 걸. 짐을 가지러 다시 들어가야 하잖아. 어쩜 이렇게 바보같이 굴었을까. 잠깐, 바보는 내가 아니라구, 아니, 솔직히 왜 저렇게 유치한거야. 진짜 몇 년을 지나도 바뀌지를 않는다니까. 아우, 진짜 매일같이 왜 저런다니. 분을 못 이겨서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문질러 닦으면서, 황소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이 도통 가라앉지를 않아서 다행히 옷은 모두 갖춰입었으니 사람을 불러서 짐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끌어낼 때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쨌거나 자신은 떠날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지, 그러면 막 후회하고 그러라지. 황소는 눈을 부릅뜨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개강 부적응중.
그래서 분량이 좀 적습니다.(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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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을 샛노란 망토에 달린 모자로 가린 여행자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일찍이 이런 장거리 여행을 하루이틀 했던 것도 아니건만 짧지 않은 시절동안 안락하게 지냈던 탓이다. 여행자는 자꾸 나른해지는 팔다리를 추스르며 새가 지저귀고 꽃들이 아름다운 산길을 묵묵히 걸었다. 입에서는 자꾸 불만의 한숨이 새어나왔지만 물론 꾹 참았다. 피로와 불만을 연료로 분노를 태워가며 여행자는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

사람들은 작은 혼란 속에서도 익숙하게 일말의 규칙을 발견하여 무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마법의 탑이 다스리는 마을이란 으레히 특별하기 마련인 것이다. 덕분에 오고가는 마을 사람들은 실의에 빠진 채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아가씨를 위로해 줄 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심술쟁이 대머리 마법사가 마을에 저질렀던 사소한 실수들이 수십년의 세월을 넘어 타인의 입으로 재구성되는 것은 물론 흥미진진한 일이었으나 그녀가 오늘 저지른 실수도 수십년 후에 다시 설화로 재구성될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 덕에 별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돌로 표시해 놓은 사거리에 앉아서 책의 찢어진 드레스 수선 부분을 뒤척이다가 아가씨는 빠른 속도로 의욕을 잃었다. 마법의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더 큰 오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오류를 찾아 수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마법에서 오류의 근본을 추측하기에는 아가씨의 지식이 좀 짧았다. 따라서 마법이 만들어 낸 새로운 문제 자체를 해결하기 위해 수선의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던 아가씨의 생각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아가씨가 가져온 책은 물질화된 개념에 적용되는 마법들이었고 따라서 존재 자체가 개념에 더 가까운 요정의 드레스를 수선하는 것에는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가씨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날씨는 수확의 때를 앞둔 가을 날씨답게 청명했다. 하늘은 높고 맑았고, 밀은 익어가고, 소와 돼지는 살찌고, 양들은 평화로웠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수확을 준비하기 위하여 벤자민씨의 방법을 시도하며 부단히 사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모두들 아가씨가 고민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추어 아가씨의 실수를 위로하고 시도를 응원하였다. 물론 그 중에는 문제의 원흉인 주정뱅이 과수원지기도 있었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능숙하게 집으로 가는 척 술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애초에 의뢰받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문제를 떠안게 된 것이, 그리고 사과 열 개를 더 받지 못하게 된 것이 새로운 분노를 일으켰다. 아가씨는 마침내 다 먹은 사과 씨앗을 격하게 땅에 패대기쳤다.

아가씨는 결국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 저주 되돌리기를 시행하여 일시적으로 마법의 반사효과를 자신에게 씌우기로 하였다. 요정의 마법이 풀리기까지, 혹은 드레스를 수선할 때 까지는 계속 가고 싶은 길의 반대방향으로 걸어야 하겠지만 그게 불편하다면 탑에서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다. 마법의 효과가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탑의 이름으로 맹세를 촉구한 스승님에게 수습을 부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우울하게 몇 개의 동심원에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낙서에 불과한 그림 몇 개를 그려넣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주문을 읊기 전에 새로운 목소리가 아가씨의 말을 멈추었다.

"잠깐."

화려한 노란색 망토를 두른 여자가 빠른 속도로 동심원에 접근하더니 몇 개의 문자를 지우고 새 문자를 채워넣었다. 동심원에 내접하는 포물선을 맵시있게 제도한 후에야 그녀는 허리를 폈다.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사용하면 술자와 피술자를 활용한 함수를 형성할 수가 있지. 절편이 이루는 거리에 따라서 마법의 지속 시간을, 최고차항의 계수를 활용하여 힘의 작용방향을 결정할 수가 있다고. 여기를 이렇게 지우고 여기를 이렇게 채운 덕분에 봐, 새로운 방향의 작용점과 작용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돼. 핵심은 완벽하게 한 점에서 접하도록 그려주는 거야."

멍한 상태로 쏜살같이 쏟아내는 해결방식을 듣고서야 눈부시게 반짝이는 노란 망토 때문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행색은 그 유난스런 노란 망토 외에는 전통적인 여행자의 복장이었고 허리에 차고 있는 시계는 공식 인가를 받은 마법종사자들을 위한 마녀 회의의 선물이었다. 절대로 맞는 시간을 가르키는 일이 없는 그 시계의 복잡하게 움직이는 바늘의 끝에서 마법의 기본적인 상징들이 반짝였다. 유난히 커서 깜빡이는데도 남들보다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은 눈은 낯이 익었다.

"어, 황소."

===

이미 소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머쓱한 나이가 된, 그러나 여전히 소년인 소년은 치기어린 반항을 일삼으려고 시도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처럼 떫은 포도주와 마른 빵 한 조각을 들고 길을 나섰다. 그때와는 달리 그에게는 괜찮은 말도 있었고, 나쁘지 않은 신발도 있었다. 게다가 목적지도 있었다.

"어디로 가는겨?"

그러므로 지나치게 한적한 마을로 들어서는 길 어귀에서 우연찮게 점심을 함께하게 된 수더분한 노인이 그렇게 물었을 때 소년은 덤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심술쟁이 대머리 마법사님의 탑에 가고 있습니다."

노인은 평범한 취향 덕에 떫은 포도주를 떫더름해하였으나 가을볕이 따가운 오후에 마실 것은 소중한 것이기에 마저 마시고는 답례로 소년에게 마법사의 탑으로 가는 길의 마법적인 비밀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이 길로 쭉 들어가면 사거리가 나올텐데, 거기에서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검은 탑이 잘 보이네. 그것을 바라보면서 쭉 앞으로 걸어나가면 다 찌그러진 예배당이 하나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사제를 만나서 인사를 하게. 그러면 그 사제와 다시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라고 확신하네. 그러면 다시 거기서 사거리로 돌아온 다음에, 그 사제와 엄청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그 사거리에서 앞으로 걸어가면 되지. 그러면 그 어린 대머리 놈하고 만날 수가 있는거야."

물론 소년은 그 사실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길을 출발하였다. 탑이 다스리는 마을이란 으레히 그러한 것이니까. 덕분에 소년은 길을 잃지 않고 순식간에 투덜쟁이 사제의 교회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탑의 그림자가 교회의 첨탑에 드리워지는 시간이었으므로, 사제는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무를 뽑고 있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사제에게 말을 걸었다.

"외지에서 온 객이군. 무슨 일인고?"

"마을의 사제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하여 왔습니다."

"이 얼마나 진실한 신앙의 증거인가! 어서 들어와 복음을 나누세."

그리하여 소년은 사제의 무밭에서 목 뒤에 따가운 가을볕을 받으며 별 수없이 신앙을 간증하게 되었다. 사제의 복음은 태반이 불만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것은 처음 겪는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종류의 고통이었다. 그것은 마법사의 심술처럼 언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옷에 묻은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는 성격적인 특징으로, 어릴적부터 그들과 함께 성장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성격을 개선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것은 고스란히 그들의 자식들이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자식 세대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고난의 극복에 나선 것은 아가씨였지만 그것은 소년이 길을 찾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여하튼 저녁 나절이 되어서야 사거리로 돌아온 소년은 절대로 그 사제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들이대는 내면을 설득하여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납득시킨 후에야 소년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마저 뗄 수가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마법사의 검은 탑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왜 남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있는 자리에서 나를 찾아오냔 말이야. 소원을 들어주었으니 그냥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원, 멍청하기가 끝이 없는 녀석이로다.”

“사후관리는 해주셔야지요.”

소년은 그날처럼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널찍하고 환하지만 그래서 더욱 처참한 폐허인 마법사의 작업실은 차마 눈 둘 데가 없었던 까닭이다.

부러진 깃펜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굼실거리는 먼지들 속에서 제 빛깔을 잃고 있었다. 널찍한 책상 위에는 닳아빠진 신발과 닳아빠진 동전들과 닳아빠진 양피지들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서가에 가지런히 꽂힌 두툼한 장정의 책 앞에 수북히 쌓인 것은 분명 썩은 귤들과 말린 수세미였다. 작은 노트들은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여있었지만 쌓여있는 곳이 냄비 속이었다. 그 냄비에서 끓어야 할 듯 보이는 수상한 약물은 작달막한 놋쇠 주전자에서 간헐적인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전자 입구로 넘실대는 약물은 기묘한 초록색이었다. 마법사가 소년을 노려보는 짧은 순간, 약물이 끓어 넘치더니 장작불을 덮쳤다. 머리가 아찔한 냄새가 방을 채웠다.

“아, 새 요리가 완성된 것 같군. 조금 맛을 볼테냐?”

“아뇨, 배가 불러서.”

소년은 진심으로 배가 불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법사는 흡족한 얼굴로 서랍속에서 자루를 꺼내어 책상위의 물건들을 일시에 쓸어담고 그 속에서 그릇을 꺼내어 이제는 회갈색인 사과버섯죽을 그득 담았다.

“다행이로군. 이번에는 제대로 만들어진 회심의 역작이라 남 주기 싫거든.”

“다행이네요, 정말로.”

소년의 목소리는 코를 쥐고 있었던 덕에 몹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회심의 역작덕분에 상당히 너그러워진 마법사는 소년의 시큰둥한 대꾸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가 이것을 먹는 동안만 그 사후관리인지 뭔지가 필요한 이유나 들어보자. 해줄지 말지는 그 다음에 정하겠다.”

“별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소년은 그날 그랬던 것처럼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설명을 해도 별 소용이 없을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즐기지 않는다면 바쁘다는 말은 핑계일 뿐.
아직도 스토리가 본 궤도에 들어서지 못해서 서운합니다.
처음으로 써보는 호흡이 긴 글인 만큼 감정만으로 쓸 수도 없어서 중간중간 엉성한점도.
저 자신에게 제대로 끝을 맺겠다는 것만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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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가씨와 마법사는 한 솥분량의 사과버섯죽을 먹어치우느라 고통스런 아침을 보냈다. 마법사는 죽을 모두 먹어치우고 새로운 향신료를 첨가하여 개량된 레시피를 시험해보고자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한 통 분량의 사과죽을 모두 마셔야 했다. 아가씨는 한없이 폐기물에 가까운 사과죽을 두 그릇째부터는 노골적으로 코를 막고 몇 그릇이나 들이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나 마시고도 마법사는 질린 기색도 없이 아가씨와 자신에게 소화가 잘 되는 마법을 걸고는 다시 두 그릇의 사과죽을 그득 펐다. 아가씨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고생하여 기르고 거둔 작물로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정성스러워야지, 어디서 음식투정이야."
 "사람들이 고생하여 기르고 거둔 작물인걸 알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셔야지요."
 심술로 푹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아가씨를 보고 마법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전설이 될 요리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그 전설이 기록될 페이지가 전설적 재난사라는게 문제라고 봅니다."
 "이런 고약한 제자를 보았나! 먹여주고 길러주었더니 스승의 뒷통수를 치는구나!"
 "아뇨, 이건 정수리를 가격하는 진실의 외침인 것이지요."
 "한마디도 안 지려고 따박따박 대드는 꼴이라니! 내가 너를 잘못 키웠어!"
 심술쟁이 대머리 마법사는 크게 역정을 내고 아가씨에게 한 그릇의 사과죽을 더 퍼주었다. 사실은 그 좋아하는 사과버섯죽도 열댓그릇 이후에는 마법사에게도 좀 버거웠던 것이다.

 어쨌거나 매일같은 사소한 말다툼의 끝에 마법사와 아가씨는 솥들을 깨끗이 씻고 아궁이를 청소하여 그 재를 분류하고 약재들을 선별하여 가을볕을 쪼였다. 탑의 꼭대기에 돋보기와 갈색 유리병으로 가을 햇볕을 모으는 마술적 장치의 설치를 마치자 이미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심식사가 평범한 가정식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던 마법사는 솥들에 연구서적들이 가득 들어차있는 것을 보고 크게 토라졌다. 아가씨가 다시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책을 잔뜩 넣어 솥을 메워두었던 것이다. 취미생활에 대한 인간의 온당한 권리를 수호하느라 입이 댓발이나 나온 마법사는 그러나 고귀한 마법사답게 몹시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그 날의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깊은 늪의 버섯이끼가 절명을 위한 주문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명하다. 공벌(攻伐)을 주문의 방법으로 사용할 때는 상대방이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묵사발을 내거나 혹은 그 방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대상자가 주문자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교묘한 술수를 부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방법의 단점은 제대로 공벌하지 못하고 약만 올렸을 때 술자가 부담하는 위험이 아주 크다는 데에 있다. 이 방법에 정통했던 깊은 늪의 버섯이끼도 조심스러운 사용을 당부하고 있다."

 아가씨는 오늘의 주제 선정에 눈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생각했다. 아가씨의 의뭉스런 눈길을 피하듯이 마법사는 잠시 책 한 장을 넘겨서 여백에 뭔가를 적어넣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주문 뿐만 아니라 마법약의 제조에서 또한 그러하다. 그가 공벌의 이론을 제창하기 이전에 바람난 과부버섯의 올바른 배합은 기름진 총각버섯 뿐이었으나 버섯이끼는 오랜 경험의 결과 바람난 과부버섯과 수녀의 규율버섯의 비율을 엄정하게 배합하면 바람난 과부버섯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그 왕성한 기운을 활용할 수 있다 하였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수녀의 규율버섯의 양이 조금이라도 모자라거나 넘치면 오히려 독성을 강화하는 폐단이 있을 수 있으므로 위와 같은 방법을 사용함에는 주의가 부족함이 없다 하였다."

 마법사는 묘하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책을 덮고 극적으로 소매를 휘둘렀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식사에서 얻어진 놀라운 경험의 귀결일진저! 우리는 이 새롭게 발견된 불손한 제자버섯과 사과의 배합에서 같은 이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사의 모든 식사는 실험의 연장이며 이치를 궁구함이다. 평범한 식사는 마법사에게 있어 태만이다."
 "그 까만 버섯이라면 불손한 제자버섯보다는 아무래도 검은탑의 대... 독수리 버섯이 맞지 않겠습니까. 발견자의 이름을 따는 것이 원칙이잖아요."
 "...문제는 버섯 이름이 아니라 마법사의 올바른 식생활에 대한 것이지. 크게 느끼는 바가 없는거야? 어쩌면 그렇게 창의력이 부족할까."
 "부족한 건 창의력보다는 스승님의 미각이죠. 아무리 의미가 아름답기로서니 음식 맛이 그게 뭡니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식사로 제자를 공벌하여 절명에 이르게 하려 하시는 의도가 굉장히 뚜렷하게 보이는데요."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려 들지 마라! 여기서 중요한건 나의 미각이 아니라 마법 학습의 지난함이야. 일각을 아끼지 않는 나태한 제자를 가르쳐야 하는 나의 고충을 생각해 봐."
 "사과 한 톨도 아끼지 않는 스승님의 사치스런 조리법을 보세요. 필요도 없는 음식 그렇게 잔뜩 만들었다가 상할까봐 버리는 게 일이잖아요."

 결국 말문이 막힌 마법사는 꽁한 주먹을 아금박지게 쥐고는 제자의 정수리를 깔끔하게 후려갈겼다. 따콩, 하는 소리가 본때 있게 탑을 울리는 것을 듣고 마침 마법사와 아가씨가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벤자민씨는 혀를 찼다.
 "결국 도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게 인생이지."
 톡 떨어지는 눈물을 삼키는 아가씨를 보면서 마법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의 진리지."
 꿀밤의 여운을 삼킨 아가씨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벤자민씨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마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이 일은 아무래도 마법사의 업무인 것 같단 말이야."
 "눈뜨고도 제 갈길을 모르는 멍청한 사람들과는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데."
 "그거야 멀쩡히 눈뜨고 함정에 빠졌던 자신의 어리석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겠지."
 마법사는 표독한 표정으로 벤자민씨를 한번 노려보고는 애써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벤자민씨는 짧게 다듬은 수염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이건 대머리 자네보다는 영주님께 하는 부탁이지. 영민들이 이렇게 난감한 처지에 빠졌으니 우리의 자애로우신 영주님께서 마법사 하나 섭외해주시지 않겠는가."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또 그런 소리. 우리 마을에 마법사야 대머리 너 하나뿐이잖아."
 "아, 그 대머리 소리는 좀 그만 하라니까. 어쨌든 나는 안 돼. 문제를 만들어낸 조악한 방법하며 그 오용의 결과가 빚어낸 심각하지만 단순한 작용방식 같은 것을 들어보니 이건 자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마법사가 새긴 흔적이군. 마법사가 맺은 매듭은 마법사가 풀어야 해."

 마법사와 벤자민씨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아가씨는 모르는 척 깃펜 끄트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가씨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벤자민씨가 다시 말했다.
 "스승이 그 책임을 지고 매듭을 푸는 일은?"
 "안 돼. 일단 불손한 제자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이 고귀한 마법사의 업무는 아니야."
 "그러니까, 잘 안 가르쳐준 게 죄라고 생각하고."
 "나는 실수를 해결하는 것 까지를 교육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다네. 나는 죄 없어."
 "거 맨날 애한테 같잖은 음식찌꺼기 먹여가면서 고생시킨거 생각하면 그정도는 해 줄수도 있지 뭘."
 "같잖은 음식 찌꺼기라니! 나는 내 조리법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거야 혼자 먹을거면 얼마든지 자부심을 가지시라고."

 결국 말문이 막힌 마법사가 발을 구르면서 선언했다.
 "하여튼! 일으킨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야. 나는 도와주지 않겠어."
 "저거 봐, 그런 매정한 말을 듣고 애가 훌쩍훌쩍 울잖아."
 "땀이야."
 "솔직히 말해봐, 오늘도 또 아가씨가 요리를 방해한 거지?"
 "...별개의 문제야."
 "하지만 솔직히 그 연관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지?"

 마지막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느라 부산스럽게 주변을 헤집는 척 하던 마법사는 마침내 대답을 포기하고는 날카롭게 말했다.
 "이제 그만. 농담은 그만하자고. 검은 탑의 마녀가 제 앞가림도 못하는 것 만큼 웃음거리가 될 일도 없어."
 아가씨는 고개를 수그렸다. 마법사는 마녀회의의 인정을 받은 마법사다운 태도로 단호하게 맹세를 기억할 것을 촉구했다.
 "네 잘못을 모르는 척 하지 마라. 검은 탑의 마법사는?"
 "...살아가는 것들을 위해 서원합니다. 맹세에 순종합니다."
 "좋아, 가서 네가 한 일을 해결하도록."
 그래서 아가씨는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울적한 표정으로 탑을 나섰다.

메리크리스마스에요.
닭꼬치를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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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언제나 우연을 가장한다. 누군가의 일상이 다른 누군가의 일상과 겹쳐지고 그 마주침이 어떤 사건을 만들어낸다. 우연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밀하게 짜여진 직물의 씨실과 날실이 부딪치는 광점이다. 씨실의 사정을 날실이 모르고 날실의 사정을 씨실이 모르므로 그들의 마주침은 어떤 우연한 듯 보이지만 누군가 아주 아득한 곳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정해진 궤도의 온당한 수렴이며 그로 인해 빚어지는 풍경들은 직조공의 의도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되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된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는 모든 아침과 마찬가지로 그날의 아침은 여느날과 같은 아침이었다. 아가씨는 아침에 잠에서 일어나 괴상한 빛깔이 나는 아침식사를 발견했다. 아가씨는 짧고 간결하게 음식에 대해 말했다.
 "인간이 먹을 음식이 아닙니다."
 냄비에서 잘 떨어지지 않아 거칠게 쏟아부은 형태 그대로 꾸덕꾸덕하게 말라가고 있는 버섯죽의 존재는 마법사에게도 몹시 거북하게 느껴졌지만 마법사는 그 말을 듣고 몹시 화를 냈다.
 "그렇다면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어야겠군."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승님이 요리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마법사는 아가씨가 비상식량을 비축하는 사과창고를 급습했다. 마법사가 거창하게 손을 내젓자 몹시 요란한 소리가 나고, 사과가 가득 든 술통이 날듯이 비상했다. 아가씨의 비장한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과들은 춤추듯 거대한 냄비 속으로 줄줄이 몸을 던졌다. 우울한 연기를 간헐적으로 내뱉으며 사과들은 엉겨붙은 녹색 버섯죽 속에서 빠른 속도로 부식하였다.

 그리고 한 통 분량의 사과즙을 머금어서 이제는 묽어진 시큼한 회색 버섯 사과죽을 마법사는 이번에야말로 몹시 만족하며 잔뜩 들이켰다. 일찍이 마법 약물학의 심오한 비전이 여기에 다시 부활함을 기려 검은탑의 독수리 사과버섯죽이라는 이름을 붙여 비밀 요리책에 기록하겠다고 선언하는 마법사의 환한 미소 앞에서 아가씨는 한껏 콧구멍을 밀착시키고 단숨에 그 괴음식을 들이켰다. 맛을 느끼지 않도록 먹는 방법은 생존을 위해 터득하지 않을 수 없는 기술이었다.

 생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였던 사과가 마지막 한 알까지 괴음식의 늪에서 우울하게 질식하였기 때문에 아가씨는 그날 점심에 사과와 빵을 구하기 위해 언덕 아래의 마을로 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빵을 해먹는 마을에서 빵을 사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빵은 수다쟁이 방아지기의 아내가 조금씩 구워서 팔고 있었다. 품새가 넉넉한 방아지기의 아내는 알만하다는 미소로 아가씨를 반겼다.
 "또 다 털렸구나."
 며칠간의 식사용 흰 빵과 비상용 마른 빵을 사고 아가씨는 마을의 사정을 물었다.
 "과수원댁 양반이 이번에 또 주정을 부렸다나봐. 주점에서 곤란해 하고 있단다."
 그리하여 아가씨는 주점으로 향했다.
 
 한때 거친 직업에 종사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주점의 주인은 입이 걸진 사내였다. 주정뱅이 과수원지기의 일을 묻자 주점의 주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생지랄을 하시더군."
 저녁에 팔아야 할 술이 가득한 술통을 안으로 들이며 주점의 주인은 과수원지기의 아들과 이미 다 상의가 된 얘기라며 아가씨에게 사과 열 개를 대가로 간단한 마법적 처치를 부탁하였다.
 "한 달만 여기 못 오시게 해. 한 달 동안 안 오시면 사과 열 개를 더 주지."
 아가씨는 생각했다.
 '사과 스무 개라니, 나쁘지 않은데.'
 그래서 아가씨는 그 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착수금조로 받은 사과 세 개중 하나를 아작아작 씹으면서 아가씨는 마을의 이장이자 목수인 벤자민씨에게 갔다. 한낮의 열기를 피해 나무그늘 아래서 쉬고 있던 벤자민씨가 아가씨를 먼저 발견하고 손짓으로 아가씨를 불렀다.
 "어이, 아가씨. 무슨일인가?"
 "녹슨 못을 구하러 왔습니다."
 "왜, 마법으로는 못을 못만드나?"
 벤자민씨는 다음번에는 마법으로 만들어보라며 아가씨에게 녹슨 못 세 개를 주었다.

 두 번째 사과를 아작아작 씹으면서 아가씨는 마을의 투덜쟁이 사제에게 갔다. 사제는 아이들이 흔들어놓은 교회 마당의 사과나무 주변을 청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개탄할만한 악의 종자여, 무슨 용무인고?"
 "부러진 초를 구하러 왔습니다."
 "자네도 그 대머리자식 자빠지라고 바닥에 초칠하려는거지?"
 사제는 몹시 반색하며 아가씨에게 부러진 초를 세 자루 주었다.

 세 번째 사과를 아작아작 씹으면서 아가씨는 언덕 위의 사과 과수원으로 갔다. 과수원 업무를 도맡다시피 하는 주정뱅이 과수원지기의 아들은 아가씨를 보자 경계의 태도를 띄었다.
 "뭐야, 사과 많이 줬잖아."
 "너희 아버지 머리카락이 필요해."
 "그게 필요하다고?"
 주정뱅이 과수원지기의 아들은 곰곰이 생각하다 아버지의 앞치마에 붙어있던 갈색 털 세 가닥을 건네주었다.

 아가씨는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고 사거리로 향했다. 주의깊게 땅을 파서 못과 양초와 머리카락을 묻은 후 묻은 자리에 돌을 얹어서 표시를 남긴 후 아가씨는 휘파람을 불며 주점에서 사과 일곱 개를 받아서 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법사의 사과버섯죽을 몹시 비웃으며 사과와 마른 빵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깊이 잠들었다. 별은 아름답고 양들은 조용한 밤이었다.

 아름다운 밤이었기 때문에 요정들은 모여서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사거리의 요정은 야심차게 장만한 새 드레스를 잘 차려입고 군무의 독창 파트를 맡기로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드레스가 녹슨 못에 박혀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분노로 씩씩거리며 헌 옷을 입고 잔치에 달려가던 사거리의 요정은 부러진 초를 밟고 미끄러져서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요정은 몹시 화가 났다.
 "누가 했는지 밝혀내고 말겠다!"
 요정은 옷장을 뒤져서 옥수수수염 세 가닥을 발견했다. 그것으로는 도무지 범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요정의 분노는 불특정다수의 마을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은 도무지 원하는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농장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과수원에, 과수원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초원에, 초원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밀밭에, 밀밭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농장에 도착해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고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주점으로, 주점에 가려던 사람들은 집으로 도착해있었다. 투덜쟁이 사제를 괴롭히기 위하여 벌떼처럼 출격한 아이들은 심술쟁이 마법사의 탑에 도착하여 울며 도망쳤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기 위해 마법사를 찾아가던 벤자민씨는 투덜쟁이 사제의 교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불경한 말을 내뱉었다.

 여하튼 길은 혼동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집과 일터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점심 무렵에는 끝없이 돌게 되는 혼란에 지친 모든 사람들이 집에 가기를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주점에 모이게 되었다. 주점은 개점 이래 최고의 성황을 거두었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을 다 주점에 들일수는 없었다. 벤자민씨의 지휘 아래에 마을사람들은 주점의 바깥에 빼곡하게 둘러앉아 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겁니다."
 수다스런 방아지기가 입을 열자마자 하나마나한 소리라는 비난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방아지기는 의연하게 말을 계속했다.
 "저는 분명 집으로 가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강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자꾸 산으로 들어가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묵한 대장장이가 말을 받았다.
 "저는 술을 한잔 마시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산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자꾸 강으로 가고 있었거든요. 더러운 악마에라도 홀린건가 싶어서 맥주 한잔하면서 머리를 비우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자꾸 집에 가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가자, 라고 마음먹자마자 주점으로 돌아와버렸어요."
 
 사람들은 과묵한 대장장이가 한 문장 이상의 말을 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이런 중대한 이변을 초래한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깨달았다. 부단한 수다의 결과 그들은 마법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땟국물에 찌든 검은 눈물자국이 아직도 볼에 선명한 아이들이 투덜쟁이 사제의 교회에 가려다가 마법사의 탑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벤자민씨는 마법사의 탑에 가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하며 주도면밀하게 교회로 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몇 번의 실패 끝에 언덕 위의 검은 탑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오늘도 어떤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나에게 써야할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느순간 그 두가지의 중요도가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쓰고 싶어서 쓰던 글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써야 하는 글들로 바뀌어서 나를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부담을 떨치고 하고싶은 이야기를 맘껏 수다떠는 느낌으로 주어진 시간을 조금씩 아껴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하고싶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하게 만드는 내 안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즐겁게 쓰겠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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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부유해지고 싶은 소년이 있었다.


 옛날이야기 속의 소년은 내일 먹을 것을 들고 유쾌하게 운명을 찾으러 집을 나섰을 터이지만 불행히도 소년은 내일 모레 먹을 것 같은 속물적인 근심거리를 차마 떨치지 못한 덕분에 집에 남아서 밀농사와 소치는 일을 도왔다. 목가적인 근로의 나날들 속에서 소년은 심부름을 하면서 빼돌린 약간의 재산을 축적하며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소년의 집에는 고지식한 첫째형과 수완 좋은 둘째형이 있었고 그들의 눈을 피해서 재산을 축적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었다. 형은 가족의 경조사에 소년의 재산을 동원할 것을 요구했고 둘째형은 그가 몰래 숨겨둔 동전을 찾아 자신의 영달에 사용하는데 능숙했다. 그런 까닭에 소년이 갈대처럼 훌쩍 키가 컸을 무렵에 소년에게 남은 것은 떫은 포도주 한 병을 살 돈 뿐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기박한 팔자와 좌절된 꿈을 개탄하며 떫은 포도주 한 병을 사들고 안주거리를 위한 함정을 살펴보러 갔던 소년은 그곳에 빠진 심술쟁이 대머리 마법사를 발견하였다.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심술쟁이 마법사는 소년을 보고 도움을 요청하였고 소년은 마지못해 그를 함정에서 꺼내주었다. 마법사는 그가 태양의 궤도를 살피다 함정에 빠진 것이 반나절 전의 일이라며 함정에 반나절 동안 빠져있었던 사람의 고귀한 권리를 내세워 소년의 포도주를 강탈하였다.


 “무릇 훌륭한 마법사란 발로는 단단히 땅을 딛고 머리는 하늘로 향하는 법이지.”

 괴이한 식성 덕분에 떫은 포도주를 몹시 기꺼워하며 훌쩍 들이키는 마법사에게 소년이 말했다.

 “아무래도 마법사님은 발로 땅을 단단히 딛는 법부터 다시 배우셔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 재산마저 타인의 악의에 희생당하게 된 소년의 한숨은 마법사의 심사를 몹시 비틀리게 했다. 소년의 태도에는 아무래도 그의 불손한 제자의 것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어쨌든 덕분에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너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물론 소년의 소원은 하나뿐이었다.


 “부란 목적이 있는 것이어야 하겠지. 너의 목적이 무엇이냐?”

 “목적이라니요?”

 “노후보장이나 자녀 교육비가 목적이라면 수입에 기반한 연령별 재테크 플랜이 필요하겠지. 관련 전문가가 있으니 소개해주겠다. 가능성 있는 부동산에 투자할 목적으로 재산을 원한다면 개발계획이 있는 땅을 섭외해주지. 혹은 너의 장래를 위해 투자할 생각이라면 오히려 건실한 직업을 얻어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자, 어떤 것이 너의 목적이냐?”

 “그냥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것 뿐 이에요.”

 “목적이 없다고? 그럼 무엇에 돈을 쓸 생각이지?”

 소년은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유했으면 해요. 그냥 그것 뿐이에요.”


 못마땅한 얼굴로 주름을 구기던 마법사는 마침내 한 가지 제안을 내어 놓았다.

 “멍청하기는. 너의 소원이 그것뿐이라면 방법은 하나뿐이구나.”

 마법사는 소년에게 황금 고리를 하나 주었다.

 “새벽들판에 황소가 있는데 그 황소는 마법의 황금소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황소에게 이 황금 고리를 채워서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황소가 쉴새없이 변할 테지만 절대로 놓아주어서는 안된다. 석달 열흘동안 황소를 만나서 마침내 황소에게 고리를 채우는데 성공한다면 마침내 황소가 너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다.”

 소년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소년이 첫째날 새벽들판의 황소를 만났을 때에 황소는 소년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열흘째에는 소년의 행동을 거들떠보기 시작했고 한달째에는 소년과의 만남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두달째에 황소는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세달째에는 소년이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눠먹게 되었다. 석 달 열흘째 되던 날에 황소는 마침내 소년에게 굴복하여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소년은 황소에게 황금 고리를 채워서 집으로 향했다.


 황소는 소년에게 소년의 소원을 이룰 방법을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소년은 왕궁으로 갔다.

 “저에게는 임금님께서 원하시는 마법의 황금소를 데려올 비책이 있습니다.”

 “황금소를 데려온다면 너에게 큰 벼슬과 보물을 내리겠다. 지체 없이 시행하라.”

 황소는 왕궁으로 인도되었고 소년은 큰 벼슬과 보물을 받았다. 왕의 궁전에서 황소는 소년에게 말했다.

 “매일 한번씩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당신의 소원도 꿈처럼 사라질 거에요.”


 소년은 황소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그리고 삼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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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번은 쓰자 프로젝트 첫번째입니다.
꽤 오래전부터 쓰자 했는데 지금 시작하게 됩니다.
모쪼록, 읽어주시길.



옛날에 이야기가 있었다.


마법사와 마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하늘을 날았으며, 용은 당연하다는 듯이 공주들을 납치했고, 기사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용을 죽이고 공주들을 구하였으며,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손으로 추수를 했고, 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풀을 뜯었던 옛날의 일이다.


이야기 속에는 마법사가 사는 탑이 하나 있었다. 아득한 옛날에 검은 용 하나가 무언가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굳어졌다는 탑은 그 자신으로도 오랜 마법사였으며 위대한 존재였다. 그 권위와 힘을 존중한 왕들은 탑에게 영주의 권리를 주고 그 탑의 그림자가 미치는 작은 마을을 지배하게 하였다. 탑은 과도한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 좋은 영주였기 때문에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탑의 지배를 존중했다. 마을은 힘 있는 영주들이 탐낼만큼 비옥하지도 부유하지도 넓지도 않았기 때문에 주변의 힘 있는 영주들 또한 탑의 지배를 존중했다.


이 탑에는 마법사가 살고 있었다. 마법사의 스승의 스승은 탑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친분을 맺었고 그 이후로 탑은 마법사의 거처가 되었다. 탑은 오랜 마법사였으며 위대한 존재이므로 마법사의 거처로는 훌륭하였다. 탑으로서도 손발이 없는 까닭에 해결할 수 없었던 많은 문제를 마법사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그 친분은 서로의 직분에도 좋은 일이었다.


물론 오랜 마법사이자 위대한 존재인 탑에 거주하는 마법사가 어줍잖은 재주를 가지고 있을 리 없으므로 마법사는 또한 위대한 마법사였다. 영주인 탑의 일과는 별개로 마법사 자신의 힘을 빌리는 사람들의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 가슴이 높고 당당한 흰 말을 탄 사자가 정중히 무릎을 굽히고 마법사를 청해가거나 고귀한 영주의 서신을 담은 비둘기들이 탑의 창으로 날아들었다.


고귀하고 위대한 그 마법사의 이름은 심술쟁이 대머리 마법사였다.


이천칠백서른두번째 마녀집회에서 그에게 정식으로 주어진 이름은 검은탑의 독수리였으나 마을사람들은 그가 그런 고귀한 이름으로 위대하게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에게 마법사는 파종 재배 수확 탈곡 방부 세척 소독 보관을 돕는 몹시 친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별명을 붙여 주었다. 주정뱅이인 잭이 주정뱅이 잭이 되고 대장장이인 존이 대장장이 존이 되는 것처럼 언제나 작업 이상의 부당한 대가를 요구하다 실패하여 심술궂은 인상을 찌푸리고 일에 착수하는 마법사에게 심술쟁이 마법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후 그가 머리카락들과 마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눈물겨운 이별들을 경험하는 시절이 오자 사람들은 그를 심술쟁이 대머리 마법사라고 불렀다. 물론 마법사는 이 호칭을 기꺼워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제자가 생각하기에 그는 대머리라는 부분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듯 했다. 어느 날 그가 제자를 통해 마을 이장에게 넌지시 자신의 본명을 불러줄 것을 요구하자 마을 이장인 벤자민 씨는 마법사에게 검은탑의 대머리 독수리라는 새로운 별명을 제안했다. 마법사는 다시 제자를 통해 그가 이전의 별명에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오래된 관습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그날 벤자민 씨네 집 앞의 자두나무가 벼락을 맞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으레히 그러했으므로.


그리고 말했듯이 심술쟁이 대머리 마법사에게는 제자가 있었다. 마법사의 제자는 마법사의 나이에 비해 몹시 어린 편이었는데 마법사가 그때까지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온 전도유망한 청년들을 주욱 젖소로 바꾸어서 먼 도시의 시장에 팔아버렸기 때문에 그러했다. 며칠 후 사람으로 돌아온 청년들이 마지막 여비 한 톨까지 제 몸값으로 다시 털리고 난 후 집까지의 먼 길을 마법사에 대한 각종 악담으로 도배한 까닭에 마법사의 제자를 자원하는 사람이 뚝 끊긴 어느 날 마법사가 키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여자아이 하나를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 마법에 입문하기 전의 이름은 지워지고 마법사가 되어 정식으로 이름을 받기 전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장난처럼 그 어린 여자아이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아가씨가 아가씨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 즈음에는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마법사의 심부름을 하거나 혹은 소소한 부탁을 받아서 처리하며 마을의 특산물인 사과를 얻어먹곤 했다.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사과를 통째로 아삭아삭 씹어먹는 것이었는데 마을의 사과는 무척 맛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아가씨의 기호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아가씨가 제일 싫어하는 일은 탑의 꼭대기에 있는 마법사의 거처로 물을 떠가는 일이었는데 탑은 제법 높았으므로 사람들은 아가씨의 불만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법사의 일에 참견할 만큼 대담한 사람은 마을의 불만스런 사제 뿐이었고 그 사제마저도 아가씨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가씨의 일은 오로지 아가씨의 것이었다.


마법사는 그런 아가씨의 노력을 비웃으며 튼실한 버섯으로 끓인 따뜻한 수프에 계핏가루를 들이붓는 놀라운 조리법을 선보이며 아가씨를 경악하게 했고 아가씨는 그런 마법사의 기호와 두터워지는 뱃살과 줄어드는 머리숱을 비웃으며 마법사를 분통터지게 했다. 마법사는 매일같이 아가씨를 비웃을 기회를 노렸으나 오히려 비웃음을 사는데 성공하는 일이 많았다. 마법사에게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가씨는 매일같이 마법사가 요리하는 것을 방해했으나 오히려 마법사의 기호에 맞는 괴식을 만드는데 성공하는 일이 많았다. 아가씨에게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들만 제외하면 마법사와 그 제자는 툭탁거리면서도 서로를 험담하는 사람들을 험담하는 사이좋은 관계였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그런 것처럼 별것도 아닌 일로 시끄러운, 가족이었다.


오랜 옛날의 이야기속의 위대한 왕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나라의 탑의 그림자가 미치는 범위만큼이 숲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는 그렇게 오래된 마법사이자 위대한 존재인 탑과 심술쟁이 대머리 마법사과 사과를 좋아하는 아가씨와 그들을 좋아하는 조금 짓궂은 마을 사람들과 양떼들과 사과나무숲이 살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런 옛날의 마법사와 제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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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페퍼양에 대한, 좋아하는 묘사. 이런 후줄근한 인간이 좋다.

본래 검었을 망토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새뽀얗게 먼지가 앉아 조금만 들썩여도 먼지구름이 일곤 했다. 가죽으로 만들었을 신발은 날근날근하게 삭아서 물먹은 종잇장 같다. 왼발에 신겨진 신발에서는 엄지발가락 하나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망토로 가려져 있지만 그 헐거워진 천의 헤어진 올올 사이로 보이는 옷가지도 멀쩡한 모양은 아니었다. 누렇게 빛이 바랜 면직물이 후줄근하게 늘어져 바지를 덮고 있었는데, 이 바지란 것의 모양도 흘끗 보아도 겨우겨우 바지라고 해 줄 만한 것이었다. 저 끝에서 이런 구석까지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해 온 여행자의 옷차림이라고 해야 그냥저냥 그러려니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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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내가 좋아할 듯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라크네양.
이런 건방지고 제멋대로에다가 남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 싫어함.
그리고 뻔뻔하게 그런 사람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지요.
어쩌면 부러워하는 걸지도.
내 스스로가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 그녀의 대사를 쓰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


그는 몇 번쯤 로브 너머로 그녀를 살폈다. 기묘한 처녀, 아니, 아직은 소녀라고 해야 맞겠다. 화려하게 흩어졌다 다시 모여드는 카드는 손을 슬쩍 뒤집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들이었다. 그 카드를 모으는 손은 농가의 아낙처럼 마디마디 매듭졌으나 귀부인의 그것처럼 하얗게 메말라있었다. 아니다, 그런 뽀얀 손가락은 아니었다. 그 생채기가 덕지덕지 앉은 손에는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작물의 창백함이 스며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카드를 배열하며 눈을 반짝였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속에서도 선연하게 빛났다. 몸서리치는 그를 보고 아라크네가 깔깔하는 웃음을 뱉었다.

“자, 당신의 운명을 들춰볼 준비가 되셨다면 저에게 손을.”

그런 거창한 소리를 주절이는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런 것으로 과연 나의 미래를...”

“알 수 없죠, 물론.”

그는 뒤통수라도 맞은 얼굴로 아라크네를 바라보았다. 아라크네가 다시 깔깔하고 웃었다.

“당신이니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의 점이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 뿐이에요. 내가 받는 돈은 싸구려 이야기꾼이라도 나무칼을 두들기며 한껏 추스르면 받을 만한 이야기 값이죠.”

선득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긴장했던 탓이다. 나름으로는 대단한 각오를 하고 나선 점집이다. 그런데 마을에서 가장 용하다는 점쟁이가 한다는 소리는 맥을 탁 빠지게 했다.

“자, 그렇다고 해도 제 점을 보시겠습니까? 저는 좋아할 만한 얘기라고 해도 틀린 소리는 하지 않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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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시진님의 폐쇄자에서
거미줄들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다보니 거의 저 자신의 오리지널로 수렴하고 있습니다만.
미리 얘기는 해 두겠습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아주 어릴 때의 꿈을 꾼다.

먼지와 땟국으로 얼룩진 치맛자락도 석류와 같이 아롱지게 하던 그 화려한 모닥불이 있다. 태양 아래서의 고달픔이란 그저 꿈과 같다고 귓가에 속삭이던 그녀들이 있다. 벌겋게 물들어 바닥을 두들기는 탄력있는 발길질들이 있다. 때가 절어 번질번질한 북의 가죽들과 별처럼 반짝이던 탬버린의 쇳조각들. 왁자하게 솟구쳤다가 흩어지는 웃음소리들. 길게 꼬리를 끌며 올라가던 하얀 연기들.

그 속에서 나 또한 춤추고 때로는 흐느끼곤 했다. 그러면 그녀들은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며 까슬한 입술을 볼에 비벼대곤 했다. 울지마라, 아가. 우리가 있잖니. 무서운 꿈은 저어기로 갔다. 저기? 저어기. 나는 모르겠어. 무서워. 그럼 우리 아가를 위해 무서운 꿈을 멀리 쫓아버려야지. 그녀들이 웃으며 입가로 가져가는 손가락에는 무늬없는 반지들이 불빛에 달아오르곤 했다.

저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까르륵한 웃음을 숨넘어가게 웃어대면서 그녀들은 모닥불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았다. 어느 순간에 나는 그녀들의 손을 잡고 어느새 그 말을 주문처럼 읊어대는 것이다. 저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왁자한 웃음 속 어느결에는 귓가로 젖은 목소리가 스미기도 했다. 다 저리로 가라. 오지 말아라. 다시는 오지 말아라. 어서 저리로 가련!

그리고는 더욱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탬버린 소리, 북소리는 더욱 빨라지고 화려해지는 것이다. 눈물의 보상이기라도 한 듯, 요란스럽고 화려한 소리들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그녀들과 함께 춤을 추곤 했다. 땅을 딛고, 하늘을 차고, 땅을 딛고, 하늘을 차고. 춤이라고 해 봐야 그런 단순한 동작들뿐이었지만 항상 누구보다도 흥에 겨웠다. 힘에 겨워 제풀에 지쳐 주저앉으면 그녀들은 나를 모닥불 가에 앉혀두고 탬버린을 쳐 올렸다. 타캉타캉, 단순한 리듬이 어느 정도 이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빠르게 손이 움직였다.

치맛자락이 휙휙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치마 밑으로 갈색으로 그을린 다리들이 힘껏 땅을 박찼다. 치마는 하늘을 덮고 발은 땅을 두들긴다. 북소리는 심장이 뛰는 리듬을 빼앗는다. 땅을 박차고 튀어오르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북채였다. 그녀들이 대지를 두들기는 소리에 심장이 뛴다. 숨이 막힌다. 땀방울이 튀어 나에게 닿아오기도 했다.

아하야, 땅은 넓다. 내가 갈 곳 없으랴! 누군가의 높은 목소리가 하늘을 찢으면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받았다. 빵 한 조각에 물 한 모금이면 죽을 법이야 없지, 삶이란 즐거워라!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험한 인생이었다. 빵 한 조각에 물 한 모금도 얻기 힘든 날이 더 많았으니까.

유랑극단? 그래, 그런 부류의 집단이었다. 극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조잡한 조직이었지만. 그저 춤을 추고 노래를 해서 얻어들이는 동전 몇 닢으로 하루 먹을거리를 사들이곤 했다. 말했던 대로 빵 한 조각을 얻기 힘든 날이 있는가 하면 싸구려나마 포도주를 한 모금쯤 입술에 적셔보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보통은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돌멩이 세례를 받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자기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이니까. 지금처럼 그때도 그랬다. 도둑년 소리에 눈에 물기가 어려 바득바득 악을 쓴 적도 많았다. 길을 걷다가 흙바닥에 버려진 곰팡이 핀 빵 한 조각을 주워먹다가 밤새도록 열이 올라서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들은 나의 손을 잡아주며 단조로운 가락의 자장가를 나직하게 불러주다가 울어버리곤 했다.

광산촌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우리는 언제나 환영받았다.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달콤한 과자 한두개는 언제나 나에게 그곳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할머니, 다음에 언제 광산에 가? 요놈이, 알지도 못하고? 언제나 낡아빠진 옷자락을 머리위로 깊이 눌러쓴 나의 할머니는 쿨럭하는 기침소리와 함께 그렇게 대답했다. 애가 말하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마요. 우리는 괜찮으니까. 웃어가며 그런 말을 한 뒤에는 꼭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리는 아델라였다. 네가 착한 언니를 울렸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어서 와락 울어버리는 것이다.

광산촌에 가면 레뮤엘은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내 손을 말없이 꼭 쥐어주었다. 그럴 때 그는 아델라의 이름을 들먹이며 농을 거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얼굴을 붉혀가며 고개를 젓는 수줍은 청년같지 않았다. 있잖아, 나 지난번에 봤다? 대답은 늦었다. 뭘? 아델라랑 뽀뽀했었지? 나 봤다. 그때 그의 눈에서 떨어지던 굵은 눈물방울을 기억한다. 응... 와, 다 큰 어른이 운대요! 울지마, 응? 털이 부숭부숭한 거친 손에 어디론가 끌려가던 아델라의 넋 나간 듯한 표정도 기억한다. 무엇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이었다.

포도주가 아닌 독한 술을 처음 먹어본 것도 그곳이었던 것 같다. 나도 너 만한 딸이 있지. 벌써 코가 빨간 어떤 아저씨는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어린것이 안됐다. 그 아저씨가 탁자에 엎어지면서 신음처럼 웅얼댔던 말이었다. 아마도 탁자가 춤추다가 아저씨한테 부딪쳤을꺼야. 내가 봤더니 의자랑 탁자랑 다 그렇게 춤추고 있더라니까! 에스벨린은 늘 그랬던 것처럼 깔깔하고 웃어주었다. 어린게 벌써 버릇없이!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의 짖궃은 표정을 나는 참 좋아했었다.

이런 소란스러움은 무챠가 찌그러진 냄비를 치며 식사시간을 알릴때가 되어야 비로소 잠시 잦아들었다. 정작 식사시간이 시작되면 옆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지만. 무챠는 그저 묵묵히 음식을 날랐고 내가 음식을 나르겠다고 종종걸음을 치면 눈가에 주름을 잡아가며 빙긋 웃어주었다.

물론 말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벙어리였으니까. 그녀의 나라 말로 무챠는 벙어리라는 뜻이라고, 땅바닥 한켠에 나뭇가지로 서툴게 쓰인 글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그녀를 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우리 모두의 엄마였다. 어느 저녁 어스름 살며시 눈을 떠보면 누군가가 그녀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흐득흐득 흐느끼곤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맘놓고 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무챠도 우리 할머니를 따라 왔었다.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를 보고 모여들었다. 머리를 써서 이해하기에는 불가해한 인력. 할머니가 누군가를 쓰다듬어 주고 칭찬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챠처럼 묵묵히 달래주는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누군가의 잘못이 눈에 띄면 그야말로 눈물이 쏙빠지게 혼을 내곤 했다. 누구든 할머니의 꾸중을 듣고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할머니를 떠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어느 누구도 잊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누군가가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입가에 슬쩍 미소를 얹곤 했다. 그래, 나가보니까 괜찮든?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다. 다녀왔누? 그러면 그 누군가는 젖은 목소리로 겨우겨우 대답하는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무서운 할머니가 뭐가 좋아서 다시 돌아오는지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네가 아직 어려서 몰라. 룰렌은 그런 말로 애매하게 얼버무리곤 했다. 룰렌은 몇차례나 우리를 떠났었다. 항상 목소리를 높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외치곤 했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왔다. 그녀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내가 그랬더라도 할머니는 나의 물건을 때 절어 윤기 날 때까지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잠 없는 밤을 새었을 테니.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소리내어 하지 않아도 마음을 손길에 담으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야 나에게 돌아온 엄마의 거울은 무늬를 알아볼 수 없게 민숭민숭한 모양이었다.

룰렌은 죽은 할머니의 옷자락을 부여쥐고는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그래 이제 다녀오니라고 말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가셔요. 말을 좀 해봐요. 내 너 보기 싫어서, 이 꼴 보기 싫은 것들 다 싫어서, 그냥 내버리고 가니라고, 말해요. 이 정신나간 노인네야, 당신 보기 싫어서 나갔던 나 봐요!

그날 저녁에 불꽃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금가루같이 튀던 불꽃들. 발자국이 찍히도록 콱콱 밟아대던 숨막히던 발들. 축제에 나갈때나 입었던 옷가지들을 모두 끄집어내어서는 오히려 더 신명나게 흔들어대던 그녀들. 흐드러지는 웃음과 평소에는 마실 수 없었던 술의 독한 냄새와 고깃기름이 타는 냄새가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주 기쁜 날의 축제였다.

넘나드는 불에 할머니가 날았다. 잿가루 뼛가루 뽀얗게 앉으며. 저 너머로 가신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 날 따라 별은 아주 반짝이고,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불꽃과 함께 별이 저물고, 기억이 잠든다.


별이, 불꽃이, 불티처럼 흩어지고 나의 유년이 잠들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가끔 아주 어릴 때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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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2009/12/19 22:29 : Across the Universe/단편

안개는 흩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다소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질러버린 여행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꼬일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자꾸만 확인하게 되어버린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그 자신의 생각대로 풀리는 일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작게 말하면 학점에서부터. 수업 한번을 제대로 들어본 일이 없으면서도 요행으로 학점이 좋게 나오기를 바라지만 학점은 냉정했다. 아마, 취직같은 인생이 걸린 문제에서도 요행을 바라며 그저 멍하니 이력서 끄트머리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 인생에 제대로 부딪쳐보기 위해서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비행기표를 끊었지만 또 이렇게 문제를 마주하고는 멍하니 주저앉아 버렸다.

어차피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이고, 인생일지도.

몇 달간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도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던 그녀도 저기에 저렇게 앉아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그녀의 연인이었던 남자의 퉁퉁 불어버린 시체가 그녀가 팽개친 모양 그대로 굳어있다. 그 시체를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방치해 두고 우리는 한참 머쓱한 기분에 잠겼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였고, 그래서 우리는 열흘 전에, 안개가 걷힐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시체를 파묻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이런 짙은 안개 속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공기는 축축해서 불을 붙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은 불을 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다행히도 비행기 추락의 그 날 쏟아진 비로 당분간 식수 걱정은 없을 것 같다. 먹을 것을 찾아보는 것은 일찍 포기해버렸다. 말했듯이, 안개는 짙어서 내 손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먹을 것을 찾아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본다는 것도 물론 불가능했다. 나는, 우리는, 철저히 무기력했다.

잠으로 굶주림을 애써 잠재워보지만 어느 순간 잠들면 다시 눈뜰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애써 잠을 깨우곤 했다.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아니, 있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는 있지만 부분부분 살펴보면 제법 먹을 만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한번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 생각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나는 정말이지, 배가 고팠다. 살고자 하는 욕망같은 거창한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무엇이라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무엇이라도 입에 쑤셔 넣을 수 있을 만큼.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억누를만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농담을 건네던 친구라 해도.

아직은 혐오감이 굶주림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은 다르리라. 혐오와 굶주림이 뒤얽힌 막막한 심정을 잠으로 달래보기로 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내 친구의 시체는 여기저기 헤집어져 있었다. 나는 아니다. 이렇게 여전히 배가 고픈데. 이 한정된 공간에 사람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극한 상황에서 나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먹을 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먹을 만한 부분은 제대로 골라서 뜯어먹었구나 싶다. 나는, 정말로, 배가 고팠다.

다음 순간에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나는 먹어야 했다. 그 외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이제 무얼 망설이겠는가. 애초에 망설였던 것이 잘못이었다. 킥킥하는 기묘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사지를 경련하는 시체의 살갗을, 아마도 그녀가 그의 시체를 찢을 때 사용했을 작은 나이프로 푹푹 찔러가며, 나는 먹었다. 아아, 그래.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모양이지. 삶이란 것은.

그녀의 시체가 슬슬 뼈를 보일 즈음. 안개가 걷혔다. 이제 어떤가.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 안개가 걷혔지만, 내가 이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배가 부른데.

“이 녀석이 다 먹어버린 모양이지.”

동료 경관의 욱욱거림을 등지고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세 구의 시체는 성한 데가 없었다. 연기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미친놈 아닐까. 십분만 걸어서 나가면 마을이 있는데. 이런 데에 비행기 사고 피해자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 못했던 우리도 우리지만. 자, 철수하자구. 오늘 점심은 뭐더라?”

===========================

고등학교때 나와 그는 그냥 그런 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물론 그와 별로 친한 편이 아니었지만,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의 영향력은 지나치게 컸다.
사실 완전히 호감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그냥 그런 밍밍한 관계.
하지만 고3때 나와 그는 어머니의 주선으로 친해질 수 밖에 없었고
나름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그와 친해지는 것을 때려쳤다.
과 자체가 그와 별로 관계가 없고, 졸업하고도 딱히 친할 필요가 없어서.
수많은 시험장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철저히 무시했다.


어쩌면 모멸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나를 이렇게 짓밟은 것을 보면.

그의 이름은 '영어'군이며 나는 또다시 그와 타협해야 함을 느낀다 -_-


대학교 1학년때 소설 쓰기 숙제를 무척 싫어했던 나의 친구와
영어 자기소개 레폿을 너무나 쓰기 싫어했던 나는 협정을 맺고
서로의 숙제를 대신해주기로 했었는데 이 짧은 소설이 그 결과물이다.
'시체, 남녀 한 쌍, 고립'이라는 소재로 단편 소설을 쓰는 숙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쓰면서 이것저것 더 덧붙여야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새삼 뭘 더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것은
내가 그때와 마음가짐 자체가 상당히 판이해져서
주섬주섬 덧붙이는 것이 전혀 다른 소설을 쓰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
그때 그, 실존을 위해서는 뭐든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던 굶주림은 이젠 없지만

아직도 가끔은 헛헛함을 느낀다.
 

 
2005년에 썼던 글.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구조'의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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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노곤한 날에는 빨래를 널고 낮잠을 잔다. 빨래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꾸벅꾸벅 베개를 안고 잠드는 것이 즐거움이다. 막연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즐긴다. 햇살에 반짝이는 유리창과 유난히 싱싱한 초록 잎사귀와 가끔 한번씩 불어오는 어제와 다르게 따뜻한 바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를 재운다. 아득한 시간 속, 습관처럼 그녀를 생각하면서 설핏한 잠에 빠진다.

주어진 빈 시간을 그녀 생각으로 가득 채우던 시간들이 있었다. 감당못할 만큼 벅찬 마음을 겨우 끌어안고 허덕이면서, 도무지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생각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안절부절 못하면서 할일을 찾고 그러다가 또 문득 다시 그녀가 생각나면 그 모든 것들을 팽개치고 마음 속을 배회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녀를 생각하느라 지칠만큼 자신을 안달하게 내버려두었던 날들이 있었다. 만나는 모든 것들에서 그녀를 생각하는 자신에게 짜증을 내던 날들이 있었다. 내 것인데도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죽이거나 죽어서 그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워서 그녀가 생각나고, 외로운 것들은 외로워서 그녀가 생각나는 바람에 한 순간도 자신을 쉬게 하지 않고 그녀를 생각하게 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들어주던 그녀가 있었다. 자신에 대한 마음을 한 순간도 눈 돌리지 않고 조용하게 들어주던 그녀가 있었다. 눈물이, 나도 모르게 쏟아져서 정말 보기에 안좋은 광경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염없이 소리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던 날에도 말갛게 그 자리에서 그것을 지켜봐준 그녀가 있었다. 조금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거기에 있던 그녀가 있었다.

그 모든 벅찬 감정들이 습관처럼 배어서 그저 숨쉬는 것처럼 그녀를 사랑하는 내가 있었다. 이상하지도 낯설지도 않게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녀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내가 있었다. 기쁘게 해주고 싶다,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사랑해주고 싶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외롭지 않다고,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주고 싶은 내가 있었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으로,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기억하여 고스란히 당신에게 건네주고 싶은 내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날은 잠이 드는것이 좋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까 싶어지는 날에는. 그 모든 눈물을 듣고도 앉아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던 당신을 생각하게 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나쁜 꿈인 것처럼 잊고 깨어난 후에는 더 열심히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아프고 슬퍼지는 마음을 어떻게든 보듬어주고 아름다운 것들의 아름다움에 푹 취하여 당신에게 더 따뜻하게 전해주고자 하여.

그리고 당신이 부르는 목소리에 일어나기 위하여. 저녁나절 배고픈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 나를 깨우는 그 순간에 그냥 다 잊고 배시시 웃으려고. 따뜻한 밥 한 숟갈 뜨는 당신 보면서 조금이나마 더 행복하려고.


애절 100제의 모든 글은 같은 두사람에 대해 쓰고있습니다.
글이 워낙 단편적이라서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굳이 설명을 붙여봅니다.

지난번도 그렇지만 유난 주제하고 관련없어보이는 글입니다.
수련이 더 필요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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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숙한 사람의 낯선 영정 앞에서 향을 사르고 돌아앉아 그 얼굴을 닮은 사람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익숙한 떠들썩함에 잠시 몸을 맡긴다. 권하는 술들을 말없이 받아마시고 산 사람들의 울적과 죽은 사람의 더 이상 있지 않음의 무게에 잠시 짓눌리다가도 문득 그 떠들썩함에 잠시 예리하게 깨어나게 되면 그 냄새에 주의를 기울인다. 장례식장을 장식하는 꽃들의 진한 향기가 조금씩 생각을 빼앗아간다. 술과 함께 마시는 향냄새와 흰 꽃들의 독스러운 향기가 몸 속에 조금씩 잠기는 느낌이다.

내가 죽으면 누가 저 꽃을 가져다줄까, 하는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다. 이미 죽은 후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꽃을 가져오는 사람이 누구라도. 꽃을 보내왔던 모두에게 자신의 죽음은 저 화려한 꽃다발로 관을 치장할 만큼만 놀라운 사건일것이고, 그 이후로는 슬픔이든 무관심이든 모두들 오래된 습관처럼 이쪽의 부재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겠지. 어떤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이별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누구에게는 영원히 존재하는 텅빈 구멍으로 남는 그런 부재가 되겠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겠지.

저 꽃의 꽃말이 순결이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저만큼 장례식장에 어울리는 꽃이 있을까. 청초한 백색의 꽃 속에 화려하고, 오만하고, 그리고 존재감을 지울 수 없는 향기를 품은 저것이. 누군가에게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불쾌한 존재감을 남기는 저 꽃이 죽음만큼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자신이 여기 있음을 주장하는 그것은 끊임없이 부재를 상기시키는 이 인위적인 시끌벅적함과 닮았다.

머리가 아프다. 지독하게. 조심스럽게 사죄의 인사를 남기고 일어서는 내 자리는 조금 후에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앞에서 내 예민한 투정이 무슨 의미일까. 그가 짊어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이고지고 살아야 하는 나로 돌아갈 시간. 짧은 전화통화 끝에 빼어 무는 담배연기로 묵은 상념을 털어내어본다. 소매 끝에 배어온 그 독스러운 꽃내가 잠시 다시 죽음을 상기시킨다.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죽음과는 다른, 내 안의 부재를, 상기시킨다.

감정만을 우그러뜨려서 써본 오늘의 짧은 이야기.
덕분에 글로의 짜임새가 아주 좋지는 않군요.
글은 이렇게 썼지만 장례식장은 시끄러운쪽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도무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게 되어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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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은근히 뭐 마실때 새끼손가락 세우더라.

어, 정말. 뭐야, 왜 이러지?

왜 그 드는듯 마는듯 해서 손가락이 떠있어. 처음 봤을땐 좀 웃었지.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진작 말해주지.

그게 좀 재밌잖아. 전혀 안 그럴것 같이 생겨서는.

전혀 안 그럴 것 같이 생겼다는 뭐야. 와, 근데 이거 완전 창피해.

하지만 남자가 요리도 잘 하고 손이 야무져서. 어울리기도 해. 응, 딱 너같아.

그 표현 왠지 마음에 안들어.

아니야 딱 너같아, 그냥 그 표나는 듯 안 나는듯 예민한 부분이. 좋은 점이지.

그런게 좋아?

그래서 좀 좋아.

한 줄씩 교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너무 정신없이 변해서
나는 그 모든것에 소외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그 모든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빠르든 늦든 변해가고 있습니다.
나 또한 변해가려고 합니다.
바뀌는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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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집중하고 있을 때 옆 얼굴이 참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해줘도 나는 못 보니까."

"뭐랄까, 점차 생각 속에서 다른 것들을 배제해 가는게 눈에 보이거든. 조금씩 안으로 잠겨드는 그 느낌이 좋은 것 같아."

"점차 싸늘해지는 그 느낌이?"

"그래서 안으로 점점 뜨거워지는 그 느낌이."

"모르겠어, 난."

"나는 좋아해."


좋은 소재라는 생각은 들지만
지금까지의 맥락에서는 왠지 넘기기가 힘든 주제라 대충.
일주일에 하나씩 쓰자는 생각도 했고 말입니다.

어영부영 또 시험기간이라
여러가지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마무리짓지 못하는게 싫군요..
일단 쓰던 글이나 마저 쓰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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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취한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러나 흠뻑 취한 그녀를 부축하여 돌아오는 밤은 유난히 조용해서 길거리에 딱딱 부딪치는 그녀의 하이힐 굽 소리가 멀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부연 달이 흐린 빛을 던지는 것이 시야의 한 구석에 들어온다. 어린아이처럼 굳이 혼자서 발걸음을 떼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걷는 밤이라 평소보다 가슴이 뛴다. 그녀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도 놀라서 펄쩍 뛸 만큼.

네가 나를 나쁘게 만들고 있어.

술에 잠긴 불분명한 목소리가 나직한 달빛에 젖어 속삭인다.

네가 없으면 나는 그저 혼자 슬퍼하면 될텐데. 네가 있어서 자꾸 너를 상처입히게 해.

하나도 취한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러나 슬픔에 흠뻑 젖은 목소리가 속삭인다. 조금씩 몽롱하게 눈물에 젖어가는 목소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아픔을 말하고 나에 대한 감정을 말한다.

있잖아, 자꾸 나를 상처입혀도 돼. 당신이니까.

이어지는 생각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를 생각할 때 마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생각하면 돼. 그에 대한 감정이 깊어질 수록 더 많이 나에게 미안해 하면 돼. 죽어도 그를 잊을 수 없게 되면 나도 잊을 수 없도록, 자꾸 나를 상처입혀서 계속 미안해하면 돼. 그 동안 내내 나만이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보듬어 안을 수 있도록, 내 앞에서만 약해지고 나에게만 악랄해지면 돼.

제발 나만 보고 울어줘.

그녀의 상처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소원을 달에게 떠밀어본다. 그녀가 천지간에 아무도 없이 외롭도록, 그래서 더 이상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 그것으로 밖에 이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이 가엾은 짐승을 위한 작은 기원을, 달에게 보내어본다. 안개인지 모를 무언가로 뿌연 달을 보면서 한없이 기도한다.

일주일에 하나씩은 써야지하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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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 있었던 때는 아니었다. 여럿이 함께 있지만 갑작스럽게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부드러운 침묵으로 고요를 더하는 그런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럴 때를 틈타 잠시 바삭거릴 것 같은 셔츠의 깃이나 삐뚜름하게 기울어져 있는 구두끈의 리본 끝, 잠시 내려놓은 커피잔의 얼룩이나 서류를 집는 손 끝을 잠시 들여다본다. 마치 우연인 것처럼, 스쳐 지나가는 시선처럼 무심하게. 사실은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때가 더 많았지만 그런 조용한,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는 순간을 틈타서 가끔씩 그렇게 스치듯이 시선을 던지고 덤덤하게 거둬들였다.

마음은 액체로 되어있다고, 넘쳐난다고 말했던게 누구일까. 그렇게 스치듯 살피는 순간에 심장은 쥐어짜듯이 펄쩍 뛰어오르고 순식간에 울어버릴 것 같은, 넘치는 마음에 질식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불쑥 아무 말이나 내뱉어 버릴 것 같은, 그 달콤 쌉싸름한 감정에 취해서 무너져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후회하게 될 행동을 해 버릴 것 같은 알싸한 취기. 사랑은 아니라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탐닉하는 듯한 감정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는 동안에도 서서히 넘쳐나는 마음이 있었다. 내 것이 아닌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잠시잠깐 생각하는 날이 있었다.

그 날처럼.

해가 유난히도 맑았던 어느 날, 하늘에는 잔잔한 구름이 드리우고 열어둔 창 너머로 한적하게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모두들 고즈넉한 기분에 설핏 마음이 부풀어 일찍 퇴근하자고 말했다. 하나 둘 자리를 빠져나가고 어둑해지는 방 안에서 보았다. 한낮의 해가 기울어지는 순간, 맑은 해가 순식간에 붉게 타오르면서 주변의 구름을 말갛게 적셔들이는 모양을. 그와 둘이서. 참 예쁘다고, 그가 말했다. 그 말이 나에게 주어진것처럼 순식간에 마음이 일렁였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서 무언가를 말할 것도 같아서 속으로 지긋이 입술을 물었다. 울어버리고 싶어, 울어버릴 것 같아서 마음이 술렁인다.

그 때 말해버렸으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네, 그래요. 라고 내가 대답했다.

삶은 힘겨운 노역이고 시험의 연속입니다.
오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오덕냄새를 풍기며 순정만화나 읽으며 주말을 보내는
기호군 (25세, 모종의 이유로 아직도 여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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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은 약간 넉넉하게 두르는 것이 좋다. 불은 약간 센 듯하게 하는 것이 조리를 빨리 끝낼 수 있는 비결이다. 기름을 두르면서 다진 마늘을 두스푼 넣으면 기름 전체에 마늘맛이 배어서 좋다. 마늘이 익어가기 시작할 즈음에 잘게 다진 양파를 넣는다. 양파가 반쯤 투명해졌을 때 당근과 버섯을 넣는다. 이 쯤에 양파와 당근과 버섯을 젖히고 한가운데에다가 계란을 부치는 것이 좋다. 계란은 부치면서 잘 끊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만든다.

뒤집개의 플라스틱 손잡이가 녹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뒤집개를 후라이팬 위에 방치하고 간장과 설탕과 물과 고춧가루와 후추와 참기름을 내키는대로 섞어서 양념을 만든다. 양념은 약간 물이 많은 듯 하게 하는 것이 좋다. 재료들이 잠기도록 양념을 붓고 다시 졸아들도록 들들 볶는다.

재료들이 제대로 변색되면 밥을 넣는다. 밥은 비비듯이 볶아주는 것이 좋다. 이 때 쪽파가 있다면 쪽파를 잘게 썰어서 마지막단계에 투입한다. 다시 모든 재료가 골고루 섞이면서도 후라이팬에서 넘치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재료들을 볶아준다. 누룽지가 좋다면 약간 느긋한 마음으로 뒤집개로 밥을 꾹꾹 눌러주면서 기다려줘야 한다. 자, 볶음밥 완성.

둘이 먹다가 하나 죽는다는 말이 딱 맞지, 그렇지.

응, 아주 맛있어. 정말로.

레시피는 거의 오리지널에 가깝습니다. 집에 밥만 남았을 때 가끔 해먹습니다.
여자 둘이 밥 세사발을 먹어치우게 하는 비정한 요리입니다. 찹찹찹.

일상을 일상적인 말투로 쓰는 것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저 육덕진 요리도 좀 말갛게 보인다면 좋겠습니다.

제 블로그의 방문자 숫자에는 묘한 마법같은게 있는지
지난번 그 글을 올리고 나서 한자릿수대로 격감....
남들이 보러올만한 글을 자주자주 쓰겠다는 것이 최근의 야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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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가져요."
뭘 줘야할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다가 불쑥 내민 것이 그 화분이었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시간동안 그 사람의 책상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냥 있어도 존재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장식 중의 하나. 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파일들,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전부 작은 상자속에 담으면서 사람들이 달라는 것을 하나씩 집어 주다가 문득 아무것도 달라고 하지 않은 나에게 머쓱한듯이 넘겨주었다. 누구한테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저 화분이었다.

됐다고 말하기가 어색한 시점까지 주저했다가 결국 손을 내밀어서 화분을 받았다. 고맙다는 말은 입 안을 구르다가 다른 사람들의 더 큰 말소리에 눌려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버릇처럼 고개만 숙이는 내 정수리를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웃음지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사에 화답한다.

그러니까 그 화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직하는 날, 가지고 가기도 힘들어서 그 자리에 있던 누구에게 주어도 좋았을 그런 것.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에 가지고 돌아오는 날에, 작은 빨간 물뿌리개를 샀다. 꽃가게에서는 물을 주는 법도 물어보았다. 흙이 말랐을 때, 흙이 젖을 정도로만. 그것도 왠지 적당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빨간 물뿌리개로 물을 주면서 조금씩 흙이 젖어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그 날의 기억은 이렇게 꿈처럼 아득한데 그 화분은 이제 깨져버렸다. 단지 그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깨져버렸을 뿐이라고. 돌아서려는 그 순간에 다급하게 치우지 말라고 당부하면서도 그것 뿐이라고. 단지 화분일 뿐이라고.

포츈쿠키를 달아봤습니다.
오늘의 저는 뜨거운 휴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전자파가 차단되는 전기장판을 2단으로 돌려놓고 숙면을 취할 예정입니다.
스위트,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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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아끼는 화분이 깨져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의 분주한 시간 속에서 지갑을 집어올리던 손이 전선에 걸리는 바람에 그 중간에 걸려있던 화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순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손에 감싸일만한 크기의 작고 하얀 도자기 화분에 새파란 녹색 식물이 보기좋은 그 작은 화분은 파삭 소리를 내면서 한 귀퉁이가 깨져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다시 메워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지갑을 들어 핸드백에 넣고 현관을 나섰다.

다녀올께.

여느 날이면 사각이는 인사를 남기고 그대로 떠났을 그녀가 돌아보지 않고 작게 속삭인다.

치우지 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작은 파란 이파리들을 쓰다듬어본다. 이제는 그녀의 화분이라고 불러야 옳을 그것은 언젠가 그의 화분이었다고 했다. 충동적으로 달라고 졸랐을 때 선뜻 내어주었다고 했던 그것은 그에게는 어떤 의미도 없는 그저 작은 선심이었을 테지만 그녀에게는 그가 준 화분이 되었고, 이제 그녀가 깨어버리고도 버리지 못하는 기억의 파편이 되었다.

바보처럼 다시 이파리를 쓰다듬는다. 이제, 장식도 되지 못하는 그것들은 남아있는 그 자리에서 말라서 비틀어져 갈 것이다.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끝내 치우지 못하고 남아서 조용히 시들어간다. 그녀가 끝내 부인하는 이름을 끌어다가 그 감정에 입혀본다. 아마도, 연정. 그녀 자신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내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그 차고 굳은 것이 연정이라고.

어쩌면 사랑이었을 그것들을 끝내 부인하여 돌아서게 한 그녀가 그 화분을 버리지 말라고 속삭인다. 이미 멀어져버렸을 그 거리에도 불구하고 상처가 남긴 자취를 더듬어 헤집는다. 오늘 밤은 아마 술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저 조용히 멀어저 버린 애정의 파편을 쓰다듬을 그녀를 위하여. 그리고 밤새 그녀와 침묵해야 할 나를 위하여.

어떤 기억 하나를 건져서 써봅니다.
그 외에는 오늘은 노코멘트.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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